“나”와 “우리”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못 찾겠다, 꾀꼬리” 술래잡기 놀이를 하다가 친구들을 찾아야 하는 술래가 더 못 찾겠으면 그렇게 외치면 되었다. “못 찾겠다, 꾀꼬리” 그러면 숨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 술래를 정하여 술래잡기를 계속하거나 딱지치기 구슬치기 등 다른 놀이를 하면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을 던져놓고 노는 모든 것의 공통점은 혼자 놀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해가질 때까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이 당연했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혼자 논다. 같이하는 전자게임도 각각 자기만의 공간에서 하는 것이지 동네에서 친구와 같이 뒹 구르며 노는 모습은 거의 보기 힘들다. 각자의 “나”는 있어도 모두의 “우리”는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관계 중심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은 다 “나”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우리”로 살아가는데 행복을 느끼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누군가 함께하는 것에 큰 가치와 의미를 둔다. “나”는 나로 살고 “너”는 너로만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황량하겠는가. “나”와 “너”는 “우리”로 만나야 하고 살아야 한다. 마리아 앤더슨이란 유명한 흑인 가수는 이야기할 때 “나”라는 말 대신 “우리”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 나 혼자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작곡해주어야 하고 누군가 반주해주어야 하고 누군가 도와주어야 내가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 되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시간은 자기의 잘남을 증거하는 순간이 아니라 모두를 따듯하게 만들어 가는 시간이었다. 그는 “나”를 중시하지 않고 “우리”를 중요시하며 살았다. 그가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 “우리”의 따스함은 아직 곳곳에 짙게 배여 있다.

 

지금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부와 의사와의 분쟁은 그 출발부터 모든 국민의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논리와 명분이 있어 각을 세우고 있고, 대치 국면을 오래 끌고 있다. 전 국민이 가슴을 치는 아픈 갈등 속에 “나”만 돋보일 뿐 “우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원래 “품앗이”의 전통과 “두레”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일하며 서로 도와주는 공동의 선을 지향하는 나라이다. 언제부터인지 집단 이기주의가 “품앗이”와 “두레”의 정신을 짓밟고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장 1,2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영역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유한 영역주권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고유한 영역도 그 나라의 질서를 위해 세우신 각 나라의 정부에 맞대응하거나 그 위에 군림할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때문에 “나”가 무시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 더 큰 가치인 ”우리’를 버리면 결코 안 된다. 작금(昨今)의 상황 속에서 누구도 잊지 말아야 한다. 질서는 우선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요, 정부는 그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03.1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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