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서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당신은 누구요?” “제발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좋겠소.”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 공원 관리인과 그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나눈 대화였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는 유물론자였고 당연히 따르는 허무주의자요 염세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을 물질로 여겼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를 맹목적인 생존의지와 욕망을 가진 존재로만 보았다. 인간에게는 삶의 목적과 방향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가질리는 만무했다. 쇼펜하우어뿐만이 아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混沌)과 부재(不在)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며칠 전 맨해튼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기독교 세계관” class 교우들과 함께 다녀왔다. 물론 전시된 수많은 작품들 중에 아주 일부만 보고 왔다. 그 작품 중에 다른 인물, 풍경, 건물, 극적 또는 평범한 장면들을 대상으로 그린 작품은 많았지만 굳이 자화상(自畵像)은 아니더라도 작가(作家) 자기가 누구인지를 표현한 작품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모든 사물을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관찰하고 표현하는 예술가들도 자기 자신만큼은 잘 모르거나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자기 정체성을 잃은 비극적인 이야기는 많이 있다. 비슷한 내용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 독수리 알을 암탉에게 품게 했다. 그 독수리 새끼는 병아리들과 함께 자랐다. 독수리는 닭처럼 살아가면서 자신이 닭이라고만 여겼다. 세월이 흘러 독수리도 늙어갔다. 어느 날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니 큼직한 새가 우람한 날개를 활짝 펴고 세찬 바람 속에서 우아하고 위풍당당하게 날고 있었다. 늙은 독수리는 경외심을 느끼고 동료 닭에게 물었다. “저분이 누구지?” 동료 닭이 대답했다. “응, 저분은 새들의 왕이신 독수리님이야. 넌 딴 생각일랑 품지 마. 우린 그분과는 달라.” 독수리는 끝까지 자신이 닭이라고 여기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를 알려면 그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된다고 의미 있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칼빈대학의 James K. A. Smith 교수의 책 제목 “You are what you love” 가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의 주장을 과하게 표현하고 적용하자면 이렇다. 자기 직업을 가장 사랑하면 그 사람은 그 직업이다. 골프를 가장 사랑하면 그 사람은 골프다. 돈을 가장 사랑하면 그 사람은 돈이다. 음식을 가장 사랑하면 그 사람은 음식이다. 선교를 가장 사랑하면 그 사람은 선교다. 찬양을 가장 사랑하면 그 사람은 찬양이다. 그러니 사랑할 수 없는 것과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에 집착하다가 일생을 마칠 수는 없다. 부수적인 것과 지나가는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는 없다. “그것이 곧 나”라고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리라. 그런 면에서 이 찬양을 지은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삶을 살았을까?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정체성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모임이나, 자기가 졸업한 학교나, 자기가 태어난 지역에서 찾으려고도 한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정확한 자기 정체성이 될 수 없다. 나는 누구일까? 나의 정체성을 찾았다. 불멸의 정체성이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묵상할수록 울컥한 나의 정체성이다. 감사한 나의 정체성이다. 당당한 나의 정체성이다. 

03.09.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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