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어제는 삼일절 105주년 기념일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선진들의 아픔을 지금 우리가 다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105년 전 그날, 민족 대표 33인이 고초(苦楚)를 무릅쓰고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이 선언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절절함은 차고 넘친다. 삼일절 노래도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3000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뮤지컬 영화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에는 시해된 “명성황후”의 궁녀로 등장하는 “설희”라는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일본으로 가서 독립군 정보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가 위험한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이렇게 외친다.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는 제대로 된 호랑이 굴로 들어가서 독립군 정보원으로 맹활약하다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그녀가 영화에서 부른 “그대를 향한 나의 꿈”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이 어둡고 깊은 밤 지나면/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듯/ 이 차가운 겨울이 지나면/ 눈부신 한 떨기 꽃이 피듯이/ 난 다시 꿈을 꾸어요/그대 향한 나의 꿈” 그러고 보니 3월 1일은 차기운 겨울이 지나고 눈부신 꽃이 피어나는 봄의 문(門)이다. 누군가 봄의 꿈을 함께 꾸고 나섰기에 그 놀라운 봄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 위대한 역사는 무명(無名)이든 아니든 누군가 용감하게 그 역사의 무대(舞臺)로 나선 이들로 만들어져 왔다. 역사에는 만약(If)이 없다지만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서지 않았더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날 저문 들판에서 한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들고 나서지 않았다면 굶주린 수많은 무리들은 그날 배고픔을 무엇으로 해결했을까? 30대 중반의 마르틴 루터가 머뭇머뭇 거리느라 암흑의 중세를 깨트리며 과감히 나서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향해 나서지 않았다면 한국 기독교는 지금쯤 어땠을까?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지도자로 나서지 않았다면 공산주의와 맞선 한국 전쟁은 어떤 결론이 났을 것이며, 대한민국의 가난을 없애겠다는 분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한국 경제는 어떤 지표(指標)를 그려왔을까? 누군가 비행기나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만들어 보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세상은 오늘날 어떤 세상일까? 무엇보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나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 영원을 어디서 보내겠는가?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주인공 어니스트는 마을 저편에 얼굴 모양을 한 큰 바위를 보고 자랐다. 어니스트는 큰 바위와 같은 큰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일생을 보낸다. 그런 인물이 나타나지 않아 실망을 하고 있는 터에 한 사람이 외친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야 말로 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역사는 그 마지막까지 상황에 따라 각 분야에서 주저 없이 나서주는 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 누군가가 “나”이면 어떨까.
03.02.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