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르네상스를 통해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만의 삶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신적 세계를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르네상스 예술은 보이지 않는 천상(天上)의 세계를 애써 묘사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 중심의 고대 희랍과 옛 로마로의 회귀를 꿈꾸며 그런 삶의 방향을 정한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곡선과 근육에 찬탄을 보낼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면을 높이는데 열중하였다. 종교보다 과학이 더 신뢰할 대상이라 하며 이제야 종교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여기저기 모여서 희희낙락(喜喜樂樂)하였다. 르네상스의 정신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을 관통하며 현대의 철학과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신학조차 세속화 시켰다. 프린스턴 신학이 허물어지는 것을 복기(復棋)해 보라. 신정통주의의 태동(胎動)을 생각해 보라. 종교 간의 대화라는 미명아래 꽃피운 다원주의의 패역을 목도해 보라.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인지 아닌지를 인간의 이성이 결정하겠다는 현대 신학의 기고만장(氣高萬丈)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보는 것만 믿는다는 세상이 완벽히 도래했고, 21세기 팬데믹 이후의 지금도 그것이 견고한 시대정신이 되었다.
보는 것을 믿는 것, 확실한 길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보는 것에 얼마나 스스로 속는가. 나를 잘못 보고 지나치게 비굴해지거나 교만해진다. 보는 것을 믿겠다고 하는 일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길 같지만 가장 위험한 길이다.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셨다.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7-18) 눈을 떴으나 눈 먼 자가 너무나 많다. 눈으로 본다고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꼭 같은 것을 보는데 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각기 다르게 보는가. 그리고 각기 큰 소리로 자기가 바르게 보았다고 외치는데 도대체 무엇이 옳은가. 보는 것을 믿는 것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르네상스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보는 것만 믿는 세상에 믿는 것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믿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뵈오며---” 화니 크로스비가 지은 찬송을 자주 부르곤 한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의 길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천국을 선명히 보았다. 캄캄한 속에 있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분명히, 천국을 선명히 보았을까. 오직 믿음으로 보았다. 믿음으로 보는 자는 계시의존사상을 가진 자이다. 나의 이성 보다 계시가 먼저 있고, 나의 눈이 아니라 계시가 진리인 것을 알고 있기에, 보는 것을 믿는 사람으로 살지 않고 믿는 것을 보는 사람으로 산다. 보는 것을 믿으라는 르네상스와 달리 종교개혁은 믿음으로 보라고 오늘도 외친다.
보는 것을 믿는 것, 믿는 것을 보는 것. 이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갈림길이 어디 있겠는가. 르네상스의 후예들은 보는 것만 믿겠다고 한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다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믿는 것을 보며 살겠다는 자들이다. 나는 누구인가. 르네상스의 후예인가 종교개혁의 후예인가. 나는 과연 보는 것을 믿는 자인가, 믿는 것을 보는 자인가.
02.1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