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질병 중에 저장(貯藏) 강박증이 있다. 물건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물건을 버리는 것을 극도로 피하는 증상을 말한다. 언젠가 입겠지, 언젠가 쓰겠지, 언젠가 보겠지 하면서 정리하지 않는 것이 사람마다 의외로 많다. 필자만 해도 그렇다. 아내가 치수가 맞지 않는 옷을 정리하자고 하면 언젠가 다시 그 체형이 될 수도 있겠다며 한사코 반대한다. 책도 그렇다. 그 책을 구매하고도 잘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을 가능성이 별로 없는 무수한 책을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또다시 한국에서 미국으로 열심히 끌고 다니고 있다. 폐기물 수준의 물건을 쌓아 두는 사람도 간혹 있으니 그래도 그들보단 낫지 않은가 싶어 스스로 위로해 본다.
비움은 성탄의 시작이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성탄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자기 비움으로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의 비움은 쓸데없는 것을 비우신 것이 아니다. 가장 고귀한 것을 비우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동등 됨을” 비우신 것이다. 이 시대는 누구를 밟아서라도 더 높아지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삶을 사셨다. 이 세상은 누구에게 빼앗아서라도 더 채우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방향으로 걸으셨다. 비우신 예수님의 다음 행보가 있으셨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까지 가신 것이다.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은 낮춤과 복종과 죽으심에 이르시기까지 거침없이 나아가셨다. 며칠 전 선교 모임이 있어 다녀왔다. 여러 귀한 선교사님들을 만나 말씀과 교제를 나누었다. 선교사님들이 사역하는 지역은 다양했다. 그러나 공통된 것이 있었다. 그분들의 선교 사역은 예외 없이 ‘자신을 버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분들이야말로 성탄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2천여 년 전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셨을 때 빈방이 없어 구유에 누우셨다는 베들레헴 이야기는, 비움이 없는 오늘의 우리 이야기도 될 수 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 성탄을 맞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탄의 시작인 비움의 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리라.
비움의 영성은 송년(送年)의 시간에도 필요하다. 벌써 2023년 송년이란 말이 실감 나지 않는다. 꿈꾸듯 지나갔고 바람이 불듯 날아간 시간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노을은 한껏 고운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은 뭔가 무겁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의 아쉬운 장면들이 여럿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후회(後悔)와 회한(悔恨)을 품은 채 새해를 맞고 싶지 않다. 멋지고 풍성한 공원을 가꾸는 일에 무수한 가지치기가 있음을 많이 보았다. 가지치기에는 아픔이 있어도 멋진 보상(補償)이 약속되어 있다. 이 노래가 2023년 송년에도 여전히 뜨끔하게 들린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곳 없네——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그렇다. 내 안엔 아직도 내가 너무 가득 차 있다. 내 속엔 가시 가지가 너무 많이 돋아 있다. 다 가지 치고 싶다. 다 쏟아 내고 싶다. 다 비우고 싶다.
비움은 성탄과 송년의 영성(靈性)일 뿐 아니라 또한 미학(美學)이다. 미학은 말 그대로 아름다움에 대한 담론(談論)이다. 채움이 다 아름답지는 않다. 추한 채움도 많이 있다. 그러나 비움은 언제나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그리고 비움에는 항상 다가올 신선한 채움에 대한 설렘도 담겨 있다. 비움으로 성탄 하신 예수님, 얼마나 아름다우신가. 비움으로 맞이하는 새해, 얼마나 아름다울까. 비움, 성탄과 송년의 미학이여!
12.23.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