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10%, 풍성한 100%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파레토의 법칙이 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발견한 사회법칙으로서 “결과의 80%가 원인의 20%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모든 분야에서 20%가 80%를 이끈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대체로 실제에서 검증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20%의 세일즈맨들이 80%의 보험을 팔고, 20%의 어부들이 80%의 고기를 잡으며 20%의 성도들이 80%의 헌금을 낸다는 것이다. 이 퍼센티지가 감사(感謝)의 영역에서는 다르다. 20%의 감사자들이 그렇지 않은 80%의 감사자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감사의 비율은 겨우 10%에 불과하다는 것을 예수님이 열 명의 한센병 환자가 치유 받고 단 한 사람만 감사한 이야기를 통해 일러 주셨다. 예수님은 10%의 감사를 보시고 “아쉽지만 그 정도면 됐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감사는 누가 대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감사는 반드시 각자가 해야 할 몫이다. 한센병 환자들은 같이 길을 가다가 치유의 기적을 10명이 동시에 체험했다. 그런데 한 명만 감사했다. 감사하러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고독했겠는가. 우리는 모두 인생길을 걷다가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다. 올해도 그러하다. 그런데 나는 과연 감사하는 10%의 사람인가, 아니면 은혜를 받고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90%에 묻혀있는 사람인가. 

 

10%에 속했던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대단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의 감사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한 100%의 감사였다. 손양원 목사님이 공산당원에게 두 아들을 잃고 장례예배에서 하나님께서 부족한 가문에 두 명의 순교자를 주셨다며 10가지 감사 제목을 나누셨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셔서 감사,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나에게 맡겨주신 것 감사---- 주 예수께 감사” 그때 드린 순교 감사헌금이 만원, 그 당시 목사님의 사례비는 월 80원. 사례비의 100배가 넘는 헌금으로 넘치는 감사를 표현하셨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10%의 감사자에 속한다면 너무 좋겠는데 정작 드리는 감사가 받은 은혜에 턱없이 부족한 10%에 머문다면 이 어찌 진정한 감사라고 하겠는가. 사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축복을 받았는데 그에 대한 감사는 10%도 못할 경우가 너무 많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원로 목사님이셨던 고(故) 장영춘 목사님이 남기신 말씀 중에 “제대로”라는 말씀이 있다. 최고의 하나님을 섬기는데 “제대로”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제대로”라는 말씀은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셨다. 목회하면서 “제대로”라는 구절이 자주 떠오른다. 나는 과연 제대로 목회를 하고 있는가. 나는 제대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는가. 

 

우리 이민자들이 사는 나라는 청교도 신앙의 나라이다. 청교도들이 유럽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르게 된 그 당시 환경은 숱한 위험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풍토병(風土病)과 향수병(鄕愁病)도 극심했다. 그때 그들이 선택한 것은 원망이 아니었다. 공포와 불안에 떠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단 하나, 감사였다. 청교도는 신학적으로 교회사적으로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청교도는 감사의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를 필그림(Pilgrim), 순례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이 가는 길 중에 만난 하나님의 치유에 넘치게 감사했던 것처럼 그들의 순례길에 만난 하나님의 지키심과 도우심과 베푸심에 풍성한 감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감사 불감증(不感症)에 걸린 이 시대에 사마리아인은 누구며 오늘의 청교도는 어디 있나? 많은 사람이 같이하지 않아 고독해도 우리가 10%의 감사자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고 기왕이면 제대로 드리는 풍성한 100%의 감사자가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11.18.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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