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며칠 전 뉴욕 앨리폰드 공원(Alley Pond Park)의 한모퉁이에서 아름답게 울려퍼진 노래가 있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애달파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일에 탐욕하지 않으며/ 나의 나됨 버리고 오직 주님 내 안에/ 살아있는 오늘이 되게 하옵소서” 매년 가을 이맘때 즈음이면 필자가 속한 노회의 회원 부부의 야외 예배가 있곤 했다. 올해도 그런 시간을 가지며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시간에 그날 전체 사회를 보시던 서기 목사님이 노회장 목사님께 노래를 청하였다. 그때 모든 이의 잔잔한 감동을 자아냈던 찬송의 가사이다. 그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으며/ 부요해도 오만하지 않으며/ 모두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억울한 일 당해도 원통해 하지 않으며/ 소중한 것 상실해도 절망하지 않으며/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하소서”
그 가사를 음미하며 깊어가는 가을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이며, 그것에 애달파하지 않고 오늘을 감사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근자(近者)에는 욥처럼 소중한 것들을 잃은 것은 없다. 떠나는 조카 롯의 등을 바라보아야 했던 아브라함처럼 크나큰 상실감도 없다. 그런데 왜 “잃어버린 것들”이란 노랫말에 감정이입(感情移入)은 큰 것일까? 앞으로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일까, 아니면 무엇인가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인가. 어른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나이가 조금(?) 들어가면서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 하룻밤 잠을 자면 충분했던 피곤에서의 회복도 며칠 더 늘어진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얼마 전, 같은 교회에서 어렸을 적부터 청년 때까지 신앙생활을 같이 해왔던 한 살 아래의 후배가 천국으로 떠나기도 했다. 건장(健壯)하고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뚜렷하여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던 후배였다. 그런 후배가 떠났다면 그 누구도 떠나리라.
아내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머리가 너무 많이 빠졌지?” 서글픔을 안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물었던 질문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남은 것이 많아요.” 아내가 측은히 여기며 “신경을 쓰는 것이 많아서 그럴 거예요.” 라고 동조해 줄 줄 알았건만 생뚱맞은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아내의 말을 곰곰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살다 보면 내게 있던 것들, 하나둘씩 계속 잃게 된다. 그것들을 애달파하다 보면 인생은 온통 슬픔뿐일 것이다. 잃은 자리를 둘러보면 남아있는 것이 더 많다. 나의 생명, 귀한 가족, 교회, 일, 등 오늘 안에 남은 것이 많다. 은혜는 남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넘친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계신다.
잃어버린 자리에 남은 것도 있지만 새롭게 얻는 것도 있다. 신학생 남편을 잃어버린 과부가 있었다. 빚쟁이가 그 과부의 두 아들을 종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 그 안타까움을 토로(吐露)했다. 그 여인에게 남은 것은 기름 한 그릇밖에 없었다.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이웃에게 그릇을 빌려다가 기름을 따랐더니 기름이 계속 그 그릇에 부어졌다. 노회장님의 찬양이 있었던 노회 야외 예배 때에 연세는 많으시지만 가장 강력한 색상의 옷을 입으시고 모든 이의 찬사를 받으셨던 귀한 사모님이 계셨다. 우리 노회에서 연세 높으신 목사님이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하신 후, 홀로 오래 지내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신 아내요, 우리 노회의 새 선물이시다.
10.2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