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그의 일생은 전쟁과 평화의 일생이었다.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러시아와 프랑스 동맹국과의 전쟁이었던 크림전쟁에도 참전하였다. 16세 연하였던 아내와 결혼생활 48년은, 싸우다가 정들다가 한(13명의 자녀를 두었다) 전쟁과 평화의 가정이었다. 50세에 그의 내면에 전쟁이 일어났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이 일어난 것이고 그 후에 신앙의 삶으로 평화를 누렸다. 톨스토이이다. 그가 지은 ‘전쟁과 평화’는 인류 모두에게 언제나 현실인 주제이다. 전쟁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문제이지 인간의 속성은 다툼과 전쟁을 지향하다가 언젠간 반드시 폭발하고야 만다. 그 폭발로 수많은 참상을 낳고 그 결과에 몸서리치다가 평화를 그리워한다. 평화의 시간도 잠깐, 또다시 싸울 거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반복되는 역사 이야기이다. 그러기에 전쟁과 평화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나의 이야기이고 여기 우리의 이야기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또다시 터졌다. 아무리 반복되는 전쟁이라고 할지라도 이 싸움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은 매우 아프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싸우는가. 어떤 가치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까지 인질로 잡아가도 괜찮다는 것일까. 그토록 치열한 전쟁에는 우상에 가까운, 아니 어떤 때는 우상을 능가하는 이데올로기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혁명적 세계관이요 사상의 틀이라 할 수 있다. 이 틀 안에서는 무조건 자신은 선(善)이고 상대방은 악(惡)이다. 우리 민족은 언제나 옳고 다른 민족은 항상 그르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들이 벌이는 전쟁은 자기 나름대로 예배와도 같이 신성하게 여긴다. 이런 왜곡된 신념에서 출발한 전쟁은 대부분 윤리를 수반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세운 무서운 목표에만 집착한다. 우상 같은 이데올로기는 자정(自淨) 능력을 조금도 갖추고 있지 않다.
전쟁 중의 소망은 무엇인가. 평화이다. 그 평화는 진짜 평화이어야 한다. 가짜 평화 때문에 전쟁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더 사납게 일어선다. 전쟁과 가짜 평화의 악순환을 본다. 그러나 기독교는 순환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악순환이 끝없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기독교는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순환의 모습을 넘어선 역사의 끝이 있다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 기독교 역사관이다. 그 끝은 진정한 소망으로 다가온다. 절대 소망으로 다가 올 미래는 인류가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초월자가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 초월자가 누구신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시다. 그 역사의 끝에 가시적으로 오실 평화의 왕이 여기, 전쟁의 땅에 임재하시기도 한다. 전쟁의 세상에서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있다. 평화의 왕은 오늘 여기에서 우리를 그분의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시면서 그 분의 임재를 나타내신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평화의 도구가 되길 간구해 본다.
10.1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