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괜찮아”는 정말 괜찮은 말이다. 자그마한 것에도 비난과 정죄와 판단이 난무하는 세상에 부족해도, 실수해도 “괜찮다”는 말을 들으니 당사자는 얼마나 위로가 되겠는가. 하신주 선교사님이 남편 고(故) 김중원 목사님과 함께 쓰신 책 “그래도 괜찮아”는 힘들어하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제대로 못했어도, 실패했어도 그래도 괜찮아. 우리 하나님 안에서 다시 시작하자.” 이 말을 들은 청소년들이 눈물을 흘리며 변화되곤 하였다는 것이다. 왜 “괜찮아”가 청소년들에만 필요하겠는가.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교우에게도 친구에게도 모두에게도 필요하다. 이 말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먼저 들려줄 말이다. 내 자신을 바라보며 못났다고 끝났다고 좌절(挫折)하고 자학(自虐)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있다. 실패가 문제가 아니라 그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스스로에게 따듯하게 말하자. “괜찮다.” “이만하면 잘한 것이다.” “다시 일어서면 된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괜찮은 것은 아니다. 이단(異端)은 결코 조금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이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주장한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에게 ‘그 정도면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동성애자에게 갸륵한 동정심을 갖고 괜찮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거짓이나 탐욕이 어찌 괜찮은 것이겠는가. 하나님께 불순종이, 부모에게 거역함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참 교회의 세 가지 표징을 익히 알고 있다. 말씀의 참된 전파, 성례의 올바른 집행, 그리고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다. 교회의 역사는 교회 안에 치리(治理)할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필자도 한국에서 담임으로 있을 때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 여섯 차례 치리를 하였다. 미국에서도 그렇게 네 번을 치리하였다. 그 때 그 사안(事案)들을 “괜찮다”고 했었다면 교회 안에 혼란과 혼탁과 무질서가 걷잡을 수 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Right time에 “괜찮지 않아”라는 말이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도인들이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다. 거기에는 선명한 경계선(境界線)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하나님은 무조건 괜찮다고 하지 않으신다. 간음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정죄하던 무리를 다 돌려보내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괜찮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는 어설픈 박애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에 보면 인간의 네 가지 상태의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무죄 상태에서의 자유의지, 타락 상태에서의 자유의지, 은혜 상태에서의 자유의지, 영광 상태에서의 자유의지이다. 현재의 그리스도인은 은혜 상태에서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부패한 성향이 남아 있는 육체에 담긴 제한적 자유의지로 “괜찮아”를 쉽게 남발하면 정말이지 괜찮지 않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濃厚)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는 애매한 자유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괜찮다”와 “괜찮지 않다”의 경계선은 탁월한 분별력을 요청하며 엄격한 훈련을 요망한다.

 

09.0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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