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그 사람 참으로 지독하다. 송창식씨의 애를 태웠던 사람 말이다. 그의 ‘한번쯤’이라는 노래를 들어보시라. ‘----한번쯤 돌아서겠지/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 겁먹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겠지/ 시간은 자꾸 가는데 집에는 다 왔을텐데/ 왜 이렇게 앞만 보며 남의 애를 태우나----’ 그의 노래를 끝까지 들어보면 야속하게도 그 사람은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가다가 뒤돌아서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인가. 가다가 한 번쯤 뒤돌아보는 것이 큰 문제인가. 우리처럼 이민(移民) 오려다가 한두 번 뒤돌아보고 끝내 주저 않은 사람도 많으리라. 분주파부(焚舟破釜)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배를 불태우고 솥을 깨트린다는 이 단어는 뒤돌아갈 것을 포기하고 먹을 것을 접어두고 끝까지 결사 항전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숫자가 적어도 이런 자세를 가진 군사를 이길 군대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두 종류로 나뉜다. 무리와 제자이다. 무리는 예수님을 보고 환호하긴 하지만 저녁이 되면 언제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예수님의 제자는 뒤돌아가는 자가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고 모두가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뒤돌아가는 것은 물론 뒤돌아보는 것도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62)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것은 매우 어렵고 어색한 자세이다. 예수님은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도 하신다. (눅 17:32) 안타깝다. 그녀는 세상에 대한 미련이 너무 컸기에 뒤돌아본 것이었다.
지난주일 오후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고등학교 졸업생 파송 예배가 있었다. 온갖 그릇된 사상으로 가득 찬 캠퍼스 선교사로 보내는 파송 예배였던 것이다. 그날 말씀 제목은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이었고 본문은 누가복음 9장 23절이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배 가운데 이런 찬송을 함께 불렀다.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No turning back, No turning back’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장엄한 찬양이었고, 모든 성도들의 결연한 고백이기도 했다.
졸업생들은 예배 가운데 죄를 버리고, 자기 고집을 버리고, 나쁜 습관을 버리고,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만을 따르기로 다시 결단하였다.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들에게 세상은 얼마나 매혹적이겠는가. 자유를 만끽할 절호의 찬스(?)에서 오히려 그들은 인생의 가장 큰 가치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 그것도 매일. 그리고 죽을 때까지 예수님만 따르는 길이다. 그날 이런 파송의 노래가 교역자들과 장로님의 입술에서 울려 퍼졌다. ‘너의 가는 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가시니/ 너의 걸음 걸음 주 인도하시리/ 주의 강한 손 널 이끄시리/ 너의 가는 길에 주의 축복 있으리/ 영광의 주 함께 가시니/ 네가 밟는 모든 땅 주님 다스리리/ 너는 주의 길 예비케 되리’ 그렇다. 오늘도 예수님은 ‘No Turning Back’의 제자를 찾으신다.
08.12.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