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침묵과 무관심은 겉으로 보기에 비슷하다. 그러나 침묵과 무관심은 전적으로 다르다. “무관심의 절정”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작품으로서 철학자 필리프 프티와의 대담을 싣고 있는 책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이 있다면 무관심이요, 이 땅에 가장 큰 죄악이 있다면 다름 아닌 무관심이기에 그 내용을 떠나서 “무관심의 절정”이라는 책 제목은 이 시대를 대변하기에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깊은 탄식이 여기에 있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 11:17) 무엇을 해도 도무지 반응이 없는 무관심에 대한 강한 질타이시다. 그 뿌리 깊은 죄악과 질병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도져서, 하나님께도, 교회에도, 이웃에도, 다른 민족에도, 다음 세대에도 철저한 무관심, 그야말로 무관심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는 그렇지 않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무관심하셨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의 고난도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어린 관심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영생과 축복을 가져다 주었고 또 앞으로 누릴 유업과 상급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내일이면 종려주일이다. 그리고 이어서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한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한 죽음의 길을 걸으셨는데 정작 나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이리저리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작 예수님의 대해서는 ‘무관심의 절정’으로 지내려는 것은 아닌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자. 어디선가 들리는 듯하지 않는가? “죄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무관심과 비슷한 침묵이 있다. 말은 없지만, 그 침묵은 깊은 관심의 절정일 뿐이다. Anon이라는 작가의 짧은 글, “긴 침묵(the long silence)”이 있다.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힘들었던 과거 이야기를 한다. 이런저런 억울한 사연들로 항변한다. 이들은 사람들을 심판할 하나님이 사람들의 이런 사정을 아시기나 하냐면서 하나님에 대해 의구심과 불평을 쏟아 놓는다. 이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심판의 내용을 말씀하실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의 내용을 말씀하시는 대신 길게 침묵하셨다. 그들의 생애를 관심있게 지켜보신 하나님의 침묵이시다. 그“긴 침묵”은 어떤 준엄한 책망보다 더 큰 울림이 있었다.
말 많은 시대에 때론 “긴 침묵”으로 말해 보자. 긴 침묵은 어떤 웅변보다 강할 것이다. 긴 침묵은 어떤 지혜보다 빛날 것이다. 긴 침묵은 어떤 행동보다 바를 것이다. 긴 침묵은 어떤 시간보다 멋질 것이다. 긴 침묵은 어떤 감정보다 깊을 것이다. 긴 침묵은 어떤 변명보다 찰질 것이다. 긴 침묵은 어떤 책망보다 아플 것이다. 긴 침묵은 무관심의 증거가 아니다. 반대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은 긴 침묵으로 말씀하셨다. 그 침묵 속엔 사랑이 있었다. 용서가 있었다. 지극한 관심으로 가득찬 침묵, 예수님의 침묵이셨다. 고난 주간이 되어도 아무 말 없는 그대는 냉정한 무관심의 사람인가, 예수님의 고난을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고귀한 침묵의 사람인가.
04.0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