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리안 켈리 목사

이영희 목사

교도소 교목, TPPM대표 

리안 켈리 목사님은 58세이다. 1987년에 “열린 문”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하여 덴버시에서 가장 오래된, 범죄조직에 대항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기관의 사명은 범죄 조직원 모집을 억제하고 거리의 폭력조직을 줄이려고 학교 내와 방과후 프로그램들, 아이들 양육수업들, 십대들의 고용과 직원훈련, 피해자 가족지원, 지역사회 계몽 등을 포함한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아이들과 접촉한다.

방과 후 프로그램은 6-14세인 약 200명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다. 학생들에게 자기절제와 자기개발을 특히 강조하고 인성교육뿐만 아니라 학업도 도와준다. 아이들이 부정적인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긍정적인 선택들을 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재소자 인원이 많은 국가이기 때문에 특히 켈리 목사님의 사역은 중요하다.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한데 오늘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안전과 보호, 양육 등 많은 어려움이 발생한다. 아이들은 그 결핍을 거리의 잘못된 사람들로부터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잘못된 환경에 노출되고 범죄로 연결된다.

그래서 켈리 목사님은 그런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일반인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범죄조직에 가담하는 것의 위험성과 중독, 전과자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해 교육한다. 켈리 목사님의 사무실에는 폭력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한 젊은이들의 명단이 비치되어 있다. 2011년 6월 18일 현재 그가 사역을 시작한 이래로 996명이 되었다. 어떤 때에는 한 주에 두세 명의 젊은이들을 땅에 묻었다. 이런 비극을 통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유족들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사역을 이끌어갔다.

2010년 켈리 목사님은 지역사회와 아동들을 위해 헌신한 노력을 인정받아 콜로라도 주지사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그의 노력으로 어린 나이에 폭력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부터 범죄조직과 관련해서 범죄행위에 연루된 수많은 아이들이 도움을 받았다. 나는 앞으로도 그의 사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거라고 믿는다.

2007년 성령님께서 나에게 켈리 목사님이 간증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분에게 간증책을 쓰라고 권면했는데 다른 일로 분주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셨다. 이 책을 준비할 때 성령님께서 켈리 목사님의 간증을 넣으라고 하셔서 인터뷰를 하고 이 간증이 나오게 되었다. 그분의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읽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성장되고 삶에 대한 격려가 있기를 바란다.

 

“나의 이야기”-리안 켈리 목사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내 어머니는 사모이자 선교사였다. 장남인 내게 아버지는 근면성실을 강조하셨고 직업윤리의 중요성을 심어주셨다.

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기둥과 같은 분이셨지만 목회의 어려움을 바로 옆에서 경험한 나는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서너 번씩, 주일에는 온종일 교회에 있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 인생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덴버에 있는 이스트 고등학교에서 농구와 미식축구를 했고 콜로라도 주립대학으로 진학했는데 그 때부터 나는 새로운 세계에 무방비로 노출이 되었다. 술과 마약, 여자에 대한 탐욕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무사히 졸업을 하고 야구도 하면서 마약과 더불어 내 인생이 흘러갔다. 어느 날 도심에 있는 내 펜트하우스 발코니에 서서 생각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알고 싶다.” 그런 의문을 계속 가지면서도 여전히 나는 마약매매도 하고 마약을 사용했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이 계기가 되어 내 삶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마약을 사고 돈을 주지 않은 사람에게 위협을 하다가 실수로 총을 쏘았는데 그의 앞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는 순간 공포가 엄습했다. 내가 살인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충격에 빠져 있었는데 결국 나는 체포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끝내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터질 듯 한 느낌으로 형무소에 가게 되었다. ‘대학교육까지 받은 농구선수였던 내가 범죄자가 되다니?’ 내 스스로가 믿어지지 않았다. 테리토리얼 형무소에 도착한 후 농구선수 전력과 마약판매자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는 내 방에서 마약을 팔았다.

면회 온 어머니는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다. 순간 영혼이 찔리는 듯 한 고통이 엄습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미안하단 말이 나오냐? 정말 마음이 아프구나.” “변하고 싶은데 정말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말씀 드려라.”

마약을 파는 내 자신을 과연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안에서 의문과 혼란이 밀려왔다. 그러던 중 교도소에 있던 한 남자가 강간과 살인을 당하는 것을 보며 큰 충격에 빠졌다. 내가 이들을 위해서 할 일은 없는가?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계속 기도하자 내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죄의식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졌고 하나님께 구하라는 어머니의 조언은 내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마약판매를 중단하고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단 네 명으로 시작한 성경공부는 사십 명으로 늘어났고 시간이 흐르며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재소자들이 많아졌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나를 준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기 위해 통신 성경공부 과정을 시작했다. “나는 누구이며 내게 무슨 힘이 있는가?” 문득 내 자신에게 묻게 된 어느 토요일 통제소로 불려갔고 짐을 싸라는 말을 들었다. “이제 여기서 떠나십시오.” 기대하지 못했던 가석방 후 집에 돌아와서 숨겨두었던 코카인 한 상자를 땅에 뿌리며 선포했다. “마귀야, 이제 너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는다. 너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힘이 없다.”

그렇게 내 인생의 마지막 전환점을 맞이한 후 전과자로서 현실적인 상황과 직면해야 했다. 아무리 성실하게 면접에 임해도 전과기록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포기하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쉬지 않고 도전했다. 그리고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면접관에게 나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판단할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가치와 능력을 입증할 만한 기회를 주십시오. 2주 동안 무료로 일하며 보여드리겠습니다.” 회사는 나의 말에 동의했고 다음 날부터 출근시간은 여덟 시였지만 매일 아침 일곱 시 반에 회사에 도착해서 가장 늦게까지 일했다. “켈리씨, 잠깐 봅시다.” 일주일 후 나는 호출을 받고 간 자리에서 채용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 뒤 한 달도 안 되어서 나는 그들의 신용을 얻어서 감독이 되었다.

1984년 범죄조직들이 캘리포니아 주에서 콜로라도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크립스(범죄조직이름)라는 조폭이 덴버시의 동쪽으로 왔고 블럿스(범죄조직이름)라는 조폭은 시내의 동쪽에 있는 파크힐로 왔다. 그 당시 나는 지역 체육관에서 지도자로 일하면서 많은 범죄조직원을 포함한 동쪽 지역에 젊은이들과 친분을 쌓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의 심각성을 알게 된 나는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로스앤젤레스시로 가서 그 실태를 파악하고 덴버시로 돌아왔다.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로 시장, 시의원들과 함께 대책을 세우길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장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거나 불안감을 야기하고 싶지 않다며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러나 사태는 생각보다 빨리 악화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겁주기 위해 공포탄을 쏘던 그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을 겨냥했고 아이들이 죽어갔다. 그제서야 관계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나를 찾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나를 준비시키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yonghui.mcdonald@gmail.com

 

05.0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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