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오스틴 주님의교회)
화초에 물을 준다.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이슬 내리듯 분무기로 아침마다 잎과 줄기 그리고 이들을 자라게 하는 흙 위에 분사하고 있다. 어느 날 살펴보니 새로운 연초록 잎들이 싱그럽게 돋아 있었다. 움트는 새싹들에 반갑게 말을 건네며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란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간혹 줄기에 더는 붙어있을 힘이 없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잎들을 주우며 모든 생명은 생명주기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모든 인간은 운명공동체로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2년여의 펜데믹을 지나며 참으로 귀한 한 분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를 이 세상에서 더는 보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수정같이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자로 인격적인 성숙한 삶의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고인의 삶을 바라보며 참 좋은 분이었다는 평가를 하는 경우는 그가 이 세상에서 쌓아올린 재물이나 성과가 아닌 선한 인품으로 인한 삶임을 부인할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의 결국에 대해 지난 세대 동안 많은 사상가는 저마다의 고찰들을 이야기하지만 삶을 성장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게 보인다. 정신과 의사이자 20세기 사상가 중 한 사람인 퀴블러 로스는 “생의 수레바퀴”라는 책에서 “삶의 유일한 목적은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과제는 무조건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한다.
사람은 그가 설정한 삶의 목적대로 인생의 내용을 채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돈을 모으는데 모든 삶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업적을 이루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이들은 그것에 인생을 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어떤 삶의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할까?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대로 세상의 흐름 따라 그 조류에 휘말려 사람들이 열광하는 곳에 시간과 기운을 쏟고 있지는 않은가? 무언가를 성취하고 모으는 데만 급급해하지 말고 성장하는 데 삶의 목적을 두는 것은 어떨까? 가령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대 명령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기억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둔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의 조류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두려움 대신 내면의 안정감으로 안녕과 형통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화초의 새싹이 연초록에서 짙은 초록 잎이 되고 색이 바래지며 잎이 떨어지듯이 모든 생명체는 성장과 쇠퇴라는 생명주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생애 또한 성장기가 있으면 쇠퇴기가 반드시 찾아오는 유한한 삶임을 기억하자.
삶을 축적의 관점이 아닌 성장의 관점으로 산다면 이 세상은 더 아름답고 우리네 인생은 더욱 향기 나는 여운을 주는 삶이 되지 않을까?
“내가 알기에 살아생전에 행복하고 선을 행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전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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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