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살살 피해가며 요령껏 살라는 것도 아니고 늙어서 빈둥빈둥 놀라는 말도 아닐 게다. 쉽게 살라는 것은 남의 까닭이나 하나님의 까닭으로 일어나는 일은 꿀꺽 받아들이며 할 수 없는 것은 하늘이 말리는 일로 알아차리라는 말이다. 그렇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불확실한 것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의 반응기의 일이 아닐까.
그렇다 숨을 쉬는 것도 여름이 가을로 변하는 것도 힘들이지 않고 일어나듯이, 지구도 요란을 떨지 않고 태양 주위를 소리 없이 도는 것처럼 그저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이 쉽게 사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낮에는 태양빛을 고마워하고 밤에는 별들을 노래하며 행과 불행 모두를 잘 누리며 살 때 삶은 더욱더 깊어지리라.
믿음은 센서와 같다. 센서는 아무 때나 반응하지 않고 반응해야 할 곳에만 반응한다. 청년이 한 자매를 마음에 두었다. 그래서 주일마다 예배당에 들어오는 자매를 보기만 했는데도 심쿵! 가슴이 뛴다. 만약 그 청년이 모든 여자를 볼 때마다 그러면 그건 병적이다. 센서는 반응해야 할 곳에만 반응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사건에 믿음의 센서가 반응하는 것이리라. 십자가는 이 세상을 향해서 죽음을 선포하는 것이다(갈2:20) 다시 말해서 이 땅을 향해 반응하는 센서를 하나님이 망가뜨리셔서 하늘의 것들을 향해 반응이 시작된 것이다. 이전에는 이 땅에 것들로 인해서 내 마음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누가 나를 칭찬해주면.... 내가 돈이 좀 생기면.... 내가 아프고 병들면....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이젠 믿음을 통해서만 보이는 세상을 향해 반응한다.
똑같은 십자가를 만났는데 그 십자가를 만난 우리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우리는 똑같이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십자가 사건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믿음의 크기만큼 다르게 반응한다. 그래서 그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오늘 나의 믿음의 반응기는 얼만할까? 롯처럼 그저 흉내 내는 반응기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반응기처럼 드리고 또 드려도 조금밖에 못 드렸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반응기이면 좋겠다.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고 컸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반응기가 너무도 미약한 우리이지 않은가.
사랑해야 할 사람하나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하나 용서하지 못하는 너무도 얄팍한 나의 믿음의 반응기를 민감하게 돌아보며 이제 남은 생애동안 그 십자가 앞에 깊고 성숙한 반응기를 돌리므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데 보탬이 되는 생애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늘을 향해 나의 믿음의 반응기를 다시 올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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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