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소란하다. 주위에 아픈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런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면 한번쯤은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행복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새털처럼 행복했던 많은 순간들이 모여 오늘을 만들었으니 오늘은 아파도 행복하고 죽음조차도 감사히 맞이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렇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사람들은 그 고난이 언젠가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용광로가 되어 정금으로 제련되는 기쁨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욥이 하나님을 아는데 껍데기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고난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욥은 이런 고백을 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전에는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알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았다는 고백이리라.
사람들은 대개 어느 순간에 성장하기를 그만 두는 것 같다. 키가 어느 날 크는 것을 멈추듯이... 옛 어른들 말에 아이가 아프고 나면 훌쩍 큰다고 한다. 그 말은 사람은 일생동안 커가야 하는데 살면서 만나는 고난을 요리조리 피해만 가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가슴이 크지 않은 철부지가 된다는 말이리라. 그래서 우리는 홍수같이 많은 지식이 들어와도 웬만한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우리 마음에 감동이 말랐고 우리 눈에 눈물도 메말랐다. 우리 가슴의 양심에 찔림도 말랐고 우린 그냥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손을 들고 찬양한다. 그러나 늘 거기까지인 우리들... 한발 더 나가 힘들고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돌보지도 않고 예수님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없고 기도도 안하고 전도도 안하면서 그저 그리스도인으로 힘없이 살아가는 내 모습에 또 식상한다. 언제까지 우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만하고 살아갈까?
그렇다. 우리는 편안한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리라. 어쩌면 편안한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과 함께 가난해지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을 때 우린 하나님을 지식이 아닌 체험으로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내 환경에 찾아오는 고난이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기로 주신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싸워 물리치라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고난을 허락하신다고 했는데 곧 죽을 것처럼 앓던 사람도 ‘불이야’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뛰쳐나갈 수 있는 것은 ‘나는 아파’ ‘나는 못해’ 하고 주저앉은 그 자리가 사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주님은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 가라’고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모로서 내 삶이 아직도 힘든 것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문제 해결과 치료책을 척척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며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럼에도 나의 남은 생애도 한번 뿐이요, 우리의 목회도 한번 뿐인데 편하고 많은 것을 가진 삶이기보다 고난의 터널을 자처해 걸어가는 진짜 팔복의 행복을 맛보며 살고 싶다.
changsamo1020@gmail.com
03.2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