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교회 역사로부터의 교훈
우리는 먼저 교회와 국가가 신약의 교훈에서는 전적으로 다른 영역임을 배웠다. 교회가 국가를 통제하거나, 혹은 국가가 교회를 통제한다는 것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다. 로마카톨릭 교회가 해왔던 것 같이 교회가 국가를 통제할 정당성을 성경은 전혀 지지하고 있지 않다.
1)성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
우리는 복음의 새 포도주와 새 시대를 구약성경의 가르침의 틀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생각임을 배웠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입장이 독특하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성경구절을 일반화시킨 오류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콘스탄틴 황제 때 일어났던 교회와 국가 간의 여러 가지 일들은 신약성경의 말씀과 초대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교회역사 속의 오류들은 성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에서도 발생하는 문제들은 콘스탄틴 황제 때 시작되었던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로마카톨릭교회가 영구화시킨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에는 국가가 더 힘이 있었지만 그 국가의 세력이 기울어진 후 로마교회가 그 주위를 전도하는데 성공했고 국가의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했지만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라는 원리는 지속되어왔다.
종교개혁가들이 이런 오류에 대해 알고 있지만 정면으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는 않았고, 이것은 영국 청교도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1662년 대 추방령(Great Ejection)이 발령되었을 때에야 사람들이 그 문제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라는 전체 개념을 건성으로 넘겨버림으로 이런 관계에 있어서 방황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재침례파들은 많은 방면에서 과도하게 나간 잘못들을 저질렀지만 그들은 이런 개념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계기가 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2)교회와 국가 전체 문제에 대한 개혁주의 성도의 입장
모든 것은 단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낙착된다. 곧 국가의 기능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어떤 면에서 적극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소극적인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만일 로마서 13장의 본문과 함께 그 문제를 생각해보면, 국가의 기능은 전적으로 소극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디모데전서 2장에 사도가 디모데에게 준 교훈은 디모데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1-2절). 이것이 바로 국가의 기능이다.
베드로전서 2장의 대목을 택한다면 정확히 같은 교훈을 대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주권자들과 왕들과 국가, 그것이 어떤 권세이든지 간에 그들은 ‘악행하는 자들을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14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은혜로 세상을 다스릴 뿐 아니라, 일반은혜로 세상을 다루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해를 달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주가 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골1:16-17),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신(엡1:21) 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말하는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곧 이런 일반은혜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권세들이 하나님께 세우심을 받았으니 교회가 국가를 가르치되, 인생 전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실현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는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임무는 사회를 기독교화 하는 것이며, 국가가 기독교 교훈을 인생의 모든 방면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이 모든 것에 대해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세상을 얻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서 문화를 얻는 것’에 관해 말한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일은 점진적인 과정이어야 하며, 기독교 교훈이 사회 속에서 누룩처럼 작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교훈이 세상의 삶 속에 침투하게 되면 세상의 다른 국면들도 마귀의 포로 됨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보다 더 명백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두 관점 중에서 우리가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살펴봄에 있어서 생각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첫째로 어느 것이든지 기독교화를 운운하는 것은 항상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관점은 이단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만이 기독교 교훈을 이해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적 삶의 양식을 바꿀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않고 어떤 모양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펠라기안적인 이단의 진수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의 왕권이 점진적으로 온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흔들어 버리는 질문을 던지셨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그래서 교회가 점차 사회를 장악하고 거듭나지 아니한 세계의 삶을 주장한다고 가르치기는커녕, 그 정반대를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셨다. 19세기 말엽에 이런 가르침은 매우 낙관적이었고 세상도 낙관적이었다. 그래서 세상은 결국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온 세계가 그리스도를 위한 나라가 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는가? 결코 아니다.
성경은 마지막은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하게 올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 마지막은 위기와 심판이 될 것이며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 사이에는 영원한 차이가 있다. 그 둘 사이에 갈등이 있다. 주님께서 다시 영광스럽게 오시어 그 모습을 드러내시기 전까지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3) 개선이 아닌 발흥과 몰락
역사적으로 말해서 점차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주기적인 패턴이 계속되어왔다. 곧 발흥과 몰락이 있었다. 큰 부흥을 만날 때마다 그 부흥이 있었던 전체 지역이 그 부흥으로부터 유익을 가졌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도 그 복음적 각성의 한 결과였다. 노동조합운동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이 이런 부흥의 시대의 결과로 기독교화 되지는 못했다. 물론 그들의 행실이 어느 정도 수정되었지만, 그러나 그 일은 잠시만 지속되었고 그 변화라는 것은 결코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개선은 잠시적인 것뿐이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회에 어떤 유익을 끼쳤다고 할지라고 그 유익은 항상 잠시뿐이었다.
더 밝고 더 위대하고 더 선한 시간들 다음에는 침체와 퇴보의 시기들이 이어진다. 이는 특히 요한계시록의 가르침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성과 문명의 긴 역사를 통해서 점진적인 개선이란 것은 거짓된 사실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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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