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신앙 (76)

교회와 국가
이윤석 목사

(6)반전론자들의 비성경적 관점 평가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항상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기만이다. 반전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자기들이 기독교 원리로 간주하는 것에 따라 행동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펠라기안주의(Pelagianism)의 잘 알려진 오류이다. 

비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자체가 이단이다. 이렇게 반전론자들의 관점은 거의 성경에 대한 그릇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복음의 목적과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관점 위에 서 있다. 

반전론자가 기독교 메시지에 대해 가지는 전체 개념은, 기독교란 사랑의 메시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기독교 메시지는 서로 사랑하는 문제이며, 우리 삶 속에 예수님의 삶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던 사랑의 품격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거의 모든 반전론자들이 예수님을 그저 단순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전론자들은 그릇된 전체 입장의 한 부분이며, 십자가의 교리에 대한 전적인 오해에서 결과된 것이다. 

이 반전론자들의 입장의 진정한 비극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사람들의 행위와 같은 수준에 놓고 있다는 점이다. 반전론자들은 히브리서가 표현한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이나 비극이나 가공스러운 실수로 간주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며 그 영광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바로 그런 기초를 가진 반전론자들은 불가피하게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 관한 그릇된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죄가 무엇인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것이 정부나 국가에 대해 말하는 사고방식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람들에게 더 나은 길을 보여주기만 하면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그 좋은 길로 돌아설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기만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우리는 자신의 신학과 국가 질서와 정부에 관한 정체 관점을 개별적으로 따로 떼어서 취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 관한 그릇된 관점이나 부적절한 관점을 가진 나라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통과시키는 법의 제정에 있어서도 그릇될 것이고, 그들이 결정한 것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우리 신학과 신앙, 국가 질서는 따로 따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의 안목에서 사도들의 신앙에 입각해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성숙한 신앙인 되어야 할 것이다.

 

신학과 신앙, 국가질서는 성경의 안목에서 생각하고 결정해야
교회와 국가 관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23장에 성구 제시돼

 

7. 성경에 의존하는 교회와 국가

 

1)명확한 근거 제시의 불가능성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이 모든 정치의 역사는 성경의 가르침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후 우리는 성경으로 모든 것을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은 이런 국가와 교회 사이의 연합의 문제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신약성경에는 로마카톨릭주의처럼 교회가 국가를 지배한다든지, 아니면 에라스투스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가가 교회를 주도한다든지 하는 개념을 전혀 전달하지 않고 있다. 로마서 13장의 본문이나 디모데전서 2장이나 베드로전서 2장에서도 그런 가르침을 발견할 수 없다.

로마서 13장 1-7절은 로마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준 권고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어느 지역에 있든지 모든 교회의 지체 각 개인들에게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이다. 사도가 제시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본문들은 각 개인 신자가 국가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만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은 그 당시에 불가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로마제국의 세력 아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난 사람들로 로마 대제국의 여러 지역들에서 작은 소그룹으로 함께 모였다. 로마는 당시에 이교적인 세력으로서 많은 종교들을 믿고 있었을 뿐 아니라, 황제 숭배 개념을 도입해서 ‘가이사가 주라’고 고배할 것을 요청할 때였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어떤 연합, 또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어떤 동맹이나 협동에 대한 제안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가와 교회를 잇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것은 증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여기 본문의 말씀들은 그런 개념에 대해 문을 열어놓는 말씀이 아니다. 로마카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경우에서나 다 만찬가지다. 

콘스탄틴 황제가 4세기 초에 로마제국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 이전에는 그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 일은 콘스탄틴 황제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장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관점을 정당화화기 위해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장으로 가야 한다. 23장에 국가 행정부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고 그에 따른 성경 참고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한 사람들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 참고구절들을 제시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를 먼저 다루었는데, 그 참고 구절로서 로마서 13장 1-7절, 베드로전서 2장 13-14절이 인용되고 있다. 제 3항에서 그 신앙고백을 작성한 사람들은 국가의 행정관이 교회 생활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를 이렇게 다루고 있다: 

“국가 행정부가 말씀과 성례를 집행할 권한을 스스로 취할 수 없으며, 하늘나라 열쇠를 맡은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부는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질서를 유지하여 교회 안에서 연합과 화평이 보존되도록 할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를 순전하고 온전하게 보존하고 모든 불경건한 것들과 이단들이 억제되게 하고 예배와 권징에 있어서 모든 부패한 요소들과 악습들이 예방되고 개혁되게 하며,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이 정당하게 결정되고 집행되고 준수되도록 명령을 발하는 것은 위정자의 권한이요 또한 의무이다. 이 일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종교 회의들을 소집하고 거기에 참석하며 무엇이든지 그 회의에서 처리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처리되도록 대비하는 권한이 위정자에게 있다.”  

younsuklee@hotmail.com

 

04.2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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