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대해 가지는 결론적인 관점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국가에 대해 가지는 관계는 고작해야 잠시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애착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나그네와 순례자로서 함께 길을 가고 함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결코 세상은 놀랍게 개혁되고 온전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 그리스도인들은 이생을 위해 살고 있으며 오직 이 세상만 생각하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국가와 그들의 정당에 대해서 흥분되어 있다. 국가가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결국 그들은 거짓된 낙관주의로 가득 차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런 자리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언젠가 지상에 눈에 보이게 나타날 그 나라에 속해 있으며, 우리는 바로 이 시간도 그 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위에 있는 권세들을 세우셨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 중에 한 사람인 나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이런 조건들 속에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과 그 세상 속에서의 삶을 어떤 한계 내에 지키려고 애를 써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애착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개혁되고 놀랍게 온전하게 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음을 그리스도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대해 가진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초연한 것이다. 그들은 국가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국가 속에서 길을 잃거나 그 속에 싸잡혀 들어가 그 국가 때문에 흥분하거나 감격하거나 그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툴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다투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해 사랑하고 아끼면서 참여하지만, 영원한 것이 아님을 순간순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도 더욱 성경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좇아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말씀의 원리를 적용하며 우리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6. 국가가 일으키는 전쟁(칼)에 대한 관점
1)국가가 행하는 사형제도
국가는 생명을 취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여기서 칼을 사용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고 칼이 국가의 권위의 최종적인 표지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다스리는 권세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가 생명을 취할 권세도 가지고 있음이 명백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국가에게 허락하신 권세이다.
이런 관점에 반대하여 일어난 국가들 중에는 사형 제도를 폐지한 국가들도 있다. 그러면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보편적으로 살인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사형 형벌을 부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형반대론의 경우는 어떠한가? 구약성경의 경우가 그 답변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죽이라고 명령하셨다. 심지어 어떤 족속들은 완전히 멸절하라고 명령하기도 하셨다. 물론 수세기에 걸쳐서 성도들은 이런 원리에 따라 행동했다. 여러 나라의 육군이나 해군에 매우 성자다운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아주 뛰어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청교도 시대의 장군 올리버 크롬웰은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항상 그릇되다’는 식의 진술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어떻게 적응할까? 그런 모든 계명들이 다 개인에게 주어지고 있다. 개인이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 개인은 왼편 뺨도 돌려대야 한다. 십계명이나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국가가 행하는 사형제도에 인용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로마서 13장은 국가가 칼을 사용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말한다. 국가가 어떻게 해서 칼을 가지게 되었는가? 국가가 하나님을 대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국가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다(롬13:4). 국가가 그 칼을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국가에게 주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
구약 성경 전체의 해답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주장하시는 오직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취할 권리도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살인자의 극악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살인이 매우 특별한 범죄가 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다른 사람들의 물건이나 돈을 도적질하는 것도 나쁜 범죄이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이다.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이 가진 소유 가운데 가장 보배로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주셨으므로 하나님만이 그 생명을 취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사형판결과 같은 것은 생명의 신성함을 지속시키고 강조하고 확증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다. 만일 그런 사형판결에 복수심의 요소가 들어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사형판결의 목적은 “네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했으니 나도 너의 생명을 취한다” 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형 판결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그 주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 경계를 벗어나면 자신의 생명도 박탈당해야 함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 판결을 이행하는 것은 생명의 신성성과 엄숙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보통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휴머니스트들이나 무신론자들인 경우가 많다. 보편적으로 그들은 ‘신도덕성(new morality)’이란 것을 위하여 과격한 주장을 했던 사람들이며 동성애를 허락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던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반적인 동일한 원리에 기초하여 행동하되, 무엇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들에 관한 그들의 관점은 주로 동물적이다. 그들은 생명의 신성성과 엄숙성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이 세상 신’에 가리워 눈이 먼 자들’이 많다. 그들은 인간주의자들로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으로 끝을 내고,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로마서 13장에서 국가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다(4절)”는 말씀은 구약의 교훈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 구약의 교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원리를 사법적인 방식으로 다른 족속들에 대해서도 강화시키라고 명령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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