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의 예배(16)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 제일교회)

나) 또한 공예배를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거나, 그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무시하지는 않는지 자신을 살펴야 한다. 공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못한 탓에 예배당을 떠날 때 자신의 영혼이 매우 슬퍼하며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공예배를 저급하게 생각하고 영적인 즐거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을 하찮게 여기거나 발로 짓밟고 경멸하는 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실 수 없다. 예배의 내용을 경시하는 자들은 레위기 10장에 나오는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를 보고 그 비참한 결과를 기억해야 한다. 엘리 제사장의 가족이 몰살당한 것(삼상5:17-22), 웃시야 왕이 나병에 걸린 것(대하26:16-21), 웃사가 죽게 된 것(삼하6:6,7), 미갈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것(삼하6:20-23)은 구약에서 예배를 경시한 자의 말로라고 할 수 있다.

다) 공예배에 대하여 어떤 선입견이나 목사에 대해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자세도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원인이다. 그리스도께서 고향에서 설교하실 때 왜 그분의 공적 사역이 별로 큰 은혜를 미치지 못했던(마13:54-58) 것은 고향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예배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는 것과 같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성도 개인과 함께하시지 않는 충분한 이유이다.

라) 공예배에 나오기는 하지만 별 준비 없이 부주의한 자세로 나올 수 있다. 주님께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준비하지 않고 성의 없는 태도로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자세는 하나님의 장엄하심과 영광을 모욕하는 처사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니,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멺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6)라고 증거 한다.

마) 성도라면 공예배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깨우치는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공예배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우선하는 마음, 영적인 유익을 얻고자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는 마음을 보신다. 성도는 다윗처럼 “내가 여호와께 청했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42:1,2)라고 고백한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63:1, 2)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며,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바) 이런 거룩한 소원이 있는 자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그런 갈망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공예배를 통하여 속히 자신의 능력과 영광의 옷을 입혀 주실 뿐만 아니라,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찬양하게 만드신다. 이와 같은 갈망함이 없어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 성도의 마음이 냉랭하고 완악하고 부주의하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공예배가 은혜가 되지 않는다면 성도 개인의 게으름을 탓해야 한다.

사)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히11:6)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믿음으로 공예배에 참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붙들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능을 볼 수 없다. 사람의 불신앙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권능으로 역사하실 수 없다면, 믿음으로 나오지 않는 성도에게 공예배는 무능과 무익일 뿐이다.

아) 또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닌지를 살펴야 한다. 체면 때문이거나 그저 종교적인 습관 때문에, 또는 예배에 참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불쾌해 하기 때문이거나 부모님이나 친구 때문에 참여하는 것은 아닌가? 목사의 얼굴을 봐서 참여하는 것은 아닌가? 양심의 문을 닫을 수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은 아닌가? 영혼의 변화와 심령의 행복이 아니라 사회적인 체면이나 지위 때문에 나오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얻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영적인 힘을 공급받고자 나오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자) 공예배에 참여하면서 영적인 진보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등한히 여기지 않는가? 받은 은혜를 더 간직하고 증진시키기 위하여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이나 묵상하는 일이나 경건 서적을 읽는 일 등에 전혀 시간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닌가? 만일 성도가 공예배에 선포되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한다면, 성도의 일터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마음 밭에 떨어질 때 그것이 생명력을 발휘하도록 은밀한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태만함과 게으름과 나태함은 공예배에서 받은 은혜를 증진시키지 못하는 원인들이다. 그래서 공예배에서 주님을 만나고 즐거워할 준비를 해야 하며 합당한 마음을 갖출 때 하나님께서 바로 그 공예배에 큰 은혜를 주실 것이다.

개인적인 경건 시간을 공적 예배보다 선호하는 것은 공적 예배 시간에 가장 많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시하는 죄이다.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볍게 여기는 죄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하늘에서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다. 개인적인 것을 선호하는 것은 공예배 시간에 가장 명백하고 안위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평강과 생명의 환상들인 하나님의 현현을 천하게 여기는 죄이다.

공예배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 성소에 두신 판단의 보좌를 깔보는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을 더 선호하는 것은 공적인 은혜를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younsuk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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