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 제일교회)
2. 신령과 진정의 예배[1595호 8면에서 계속]
2)신령(영)으로 예배함이다 신령(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배의 특정한 장소나 신성한 건물에 관한 것을 말함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의 외적인 요소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지만 예수님은 내적인 문제가 중요함을 지적하셨다. 곧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이 반드시 성경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올바른 ‘영’으로 집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영으로 예배함에 대해 테리 존슨(Terry L. Johnson)은 “개혁주의 예배, Reformed Worship”란 책에서 네 가지를 말한다. 가)마음을 다하는 예배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내적으로 마음을 다하여 예배해야 한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복을 특별히 더 누리는 신성한 건물이나 신성한 장소나 신성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전이 있고, 거룩한 땅이 존재했으며, 거룩한 성전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그 모든 것을 철폐하셨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구약의 예전의식을 되살려 재현하려고 하는 이상한 일을 벌이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실제로 제단을 만들어 그 위에서 어린 양을 잡아 제사하는 의식을 거행함으로 기독교 복음을 설명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논리이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구약의 제사 의식을 재현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했다는 기록이 없다. 실체가 왔는데도 그림자로 설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칼빈은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에 대해, 구약의 선조들이 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적인 형식에서 구별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해석했다. 곧 구약의 선조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예표적인 것들에 의해 그림자로 비춰진 것을 가진 반면, 신약의 성도들은 단순성 안에서 성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구약의 상징적이고 예표적이었던 특성들과 달리 신약의 영적 예배를 강조한다. 이것은 물리적인 형상들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하는 예배를 뜻한다. 구약에서도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고 말씀하며, 표면적 할례를 말하지 않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신약의 가르침과 같다(욜2:13, 신10:16, 30:6). 다만 예배 형식의 측면에서 상징적인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갔지만 이제 신약시대에는 상징적인 것들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 마음을 다하는 영적 예배를 강조할 뿐이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이기 때문에 영적인 측면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예배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면하려면 영으로 올바른 정신과 올바른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나) 단순한 예배다
영으로 예배하는 것은 단순한 예배를 의미한다. 신약의 예배는 이전 행사와 같은 복잡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구약의 제사와 같지 않다. 신약 시대에는 물리적인 예루살렘과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약에는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의식이 없다는 것은 창조적인 자유의 측면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예배의 단순성을 더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 성도의 자유함은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는 자유함이다. 그러므로 임의 규칙들이나 사람이 제정한 규칙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셨으며, 만일 그런 것들을 사용하면 오히려 성도의 자유가 침범 당하게 된다. 성도가 순종해야 할 규정은 오직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신약 성경은 예배의 단순성을 위한 지침과 근거로 충분하다. 이는 우리의 예배가 어떤 정교한 의식이나 복잡한 절차들을 사용하지 않는 단순하고도 간단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제사장적 제의양식을 도입하거나 현대 교회의 예배축제 감독기법을 도입하여 휘황찬란한 공연방식을 도입하거나, 예술가나 배우들을 고용하여 다양한 드라마와 형상들을 드러내는 일들을 수용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단순하며 누구나 다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 히브리서 10장 19-22절이 바로 이 원리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신약 시대 성도들은 한결같이 보다 더 단순한 회당의 예배의식을 따라 성경을 읽고 설교하며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하는 간단한 방식을 채택했다.
다) 경외심으로 예배한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이 진정한 예배이다(히12:28). 그러므로 예배를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할 하늘에 계신 크신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있는가? 예배하는 자는 주님의 이름이 영광과 높임을 받고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이런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예배드릴 때 우리의 예배는 진지하고 엄숙하며 경외감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예배를 무겁게 드리자는 것은 아니다. 예배에는 경외의 요소와 기쁨의 요소가 동시에 있는 것이다.
경외심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두려워하는 것이다. 예배자인 우리는 우리들의 교회에 이런 요소들이 건재한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친구처럼 함부로 부르는 것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돌리자는 말은 입으로는 하나님께 라고 하지만 사실 공연한 자신들을 향한 격려의 박수나 칭찬의 소리가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이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로 돌릴찌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하고 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1-14).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공포심이 아니요, 무덤덤한 감사도 아니요, 마음에 깊은 감격을 안고 어려워하며 매우 조심하는 자세를 말한다. 지존하신 하나님의 이름이나 명성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떨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자세로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나타내고 있는 태도인가? 큰소리로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고 그분에게만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예의요 기쁨이 표현이라면 당신은 이런 예배자로 서 있는가?
라)지혜롭게 마친다
예배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이다. 각 예배 항목의 시간, 장소 구조 등에 대해 그 세부 사항들은 성도들의 영적, 도덕적, 실천적 수준에서 모두 납득할 만해야 한다. 이것을 누가 정하느냐는 문제는 교회의 영적 지도력에 달려 있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단들의 규례에는 예배 모범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1장 6항에, “그 상황들이 언제나 순종해야 할 말씀의 일반적 규범을 따라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4권 10부 29항에 “주님께서 주신 일반적인 원칙들로 되돌아 가야 한다. 항상 지켜야 할 주된 원리는 모든 것들이 품위가 있고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원리이다(고전11:13,14, 14:26, 40).
성결한 것들은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고 경건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의식들은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에, 성도의 분별력 있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자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예배함이 신령으로 예배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younsuklee@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