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겸손한 경청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교제(spiritual communion)의 수단으로 에임스는 두 가지를 일컫는데, 말씀의 들음과 기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문자적으로 설교를 듣는다는 것만은 아닌데, 독서 등 여타 다른 방식으로 가능하다. 말씀의 들음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의지를 내적으로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에임스는 그의 책, 청교도 신학의 정수(Marrow)에서 말씀을 받음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마음의 집중과 의지의 집약(intention of will)이라고 표현한다(Marrow of Puritan Theology). ‘마음의 집중’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기를 열망하며, ‘의지의 집약’이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마음을 다해 순종하기 위해 우리의 의지를 활용함을 말한다. 곧 시편 119:106의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다해 순종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흔들림 없이 강력하게 지키려는 의지가 요구된다. 그 말씀의 바른 들음은, 내면적 행위가 따라오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신실한 신앙적 순종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Marrow, 255). 참으로 경건하게 되려면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믿음으로부터 깨어나야 하는데,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한 그 진리의 말씀을 믿을 때만이 그 말씀에 의해 감화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Marrow, 255).
이 신앙에 의해 우리는 말씀에 매달리게 되고, 그 말씀 스스로 우리에게 매달리며 구원에로 접붙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것으로 먼저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적으로 영광을 돌리며, 다음으로 말씀의 들음을 통해 믿음, 소망, 사랑의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훈련이 되는데, 이 자체로 바른 예배가 구현되기 때문이다(Marrow, 256).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들음에 있어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은 어쩌다 하나님 대신 인간을 예배하지 않도록 인간의 말이나 인간의 문장이 하나님의 말씀과 섞여서는 안 된다.
에임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hearing of the word of God)에 반대되는 태도는 첫째 교만(pride)인데 겸손(humility), 순종(observance), 순복(obedience)과 반대되며 그 대신 인간의 의지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교만은 “모든 죄들의 원인”으로, 교만만이 유일하게 말씀의 권위를 경멸적으로 내팽개치기 때문이다(256).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세상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신들을 구하고 이들을 복종하는 우상숭배에 빠진다는 것이다(Marrow, 257).
마지막으로 에임스는 기도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청종과 기도는 구별되는데, 기도는 우리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Marrow, 259) 그런데 그 기도는 단순히 인간적 세속적 의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 무언가를 얻으려는 갈망,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구하는 의지, 결국 하나님 앞에 그 소원(desire)을 제출하고 가져다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제시는 복종적이고 겸손해야한다.”Marrow, 260)
7.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론 비교
원종천박사는 “주도홍 박사의 ‘청교도주의의 설교 이해’에 대한 논평”에서 에임스와 퍼킨스의 설교이해를 아래와 같이 피력하고 있다. 두 사람이 처한 상이한 역사상황이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론이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청교도 설교자들은 말할 수 없는 박해 가운데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며 생존의 위협까지를 감수해야 했던 성도들에게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애정적 교제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청교도의 설교 이해에 작용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에임스와는 다르게 퍼킨스의 설교이해는 구약적인 경향이 없진 않는데, 선지자적 제사장적 목사이해가 그렇다. 그가 에임스와는 다르게 설교를 영어 단어 sermon을 가져오기보다는 굳이 예언(prophecy)을 가져오는 점은 선포하고 대언하는 선지자로서 권위, 설교자 자리 이해에 무게를 두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제사장적 설교자 이해도 다르지 않은데, 대언자로서 뿐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목사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본문 중심이다. 가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자로서 설교자를 염두에 두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는 필수적이고 본질적이다. 퍼킨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의 설교자, 에임스는 강해설교자로서의 설교자를 분명하게 강요한다. 퍼킨스의 설교론은 목사중심의 하향식 경향이 보인다면, 에임스의 설교론은 말씀을 듣는 회중중심의 상향식이라 하겠다.
퍼킨스의 설교자론은 이사야가 추구했던 성령이 도우시는 ‘학자의 혀’를 갖는 설교자라면, 에임스의 설교자론은 성도들의 위치에 서서 그들을 섬기는 일꾼(ministry)으로서의 위치가 다르다. 퍼킨스는 교리를 우선시 하면서, 그 교리를 통한 성경이해를 제시하는데 이는 당시 어려운 신⋅구교 분열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제자 에임스에게서는 이런 점은 다르다. 에임스는 먼저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 후 거기로부터 설교에 필요한 교리를 추출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에임스와 퍼킨스는 설교자가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를 의뢰할 것을 요청하며, 목사는 경건생활과 겸손으로 설교가 인간의 일로 잘못되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설교자가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지만, 그 어느 때나 그 학문을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데, 설교는 결코 인간의 기술 내지는 인간의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에임스의 설교론에서 요구되는 것은 수사학이 아닌 순수한 단순성(the naked simplicity)이며,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은 가식(affectation)이다.
퍼킨스와 함께 에임스는 설교 적용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의 설교 적용은 예리하며 분석적이며 실질적이고 목회적이다. 그럼에도 적용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퍼킨스가 율법적 적용과 복음적 적용을 나누며, 설교자 중심의 적용이라면, 에임스는 말씀을 듣는 성도 중심의 복음적 적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 예로, 퍼킨스가 가져오는 성령이 가져다주는 ‘학자의 혀’ 천사론은 설교자를 위로하고 돕는 자이다. 그 대신 에임스는 설교자가 성도들을 위로하고 섬기는 종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퍼킨스의 설교론에서 나타나는 특이성은 두 가지를 제시할 수 있는데, 설교자를 기쁘게 도와주는 천사론과 설교자를 최고로 대우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적 개혁안이다.
5. 나가는 말
16⋅17세기 주의 몸 된 교회의 신실한 종이었던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론은 오늘 21세기 한인교회들에게 귀한 교훈과 경종을 준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이며, 둘째는 그 말씀의 강한 적용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교회의 타락은 설교의 타락에서 출발한다. 청교도주의를 부흥운동 각성운동 설교운동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은 근저에 성경 운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설교를 잊지 않았다.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론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가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운 상황에 이른 이유 중의 중요한 한 가지는 세속적 가치관을 가지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설교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세속적 가치관이 교회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목사들과 교회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청교도의 설교론에 있어서 강점은 적용인데, 이 점에서 교회 설교자들이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많은 교회 설교자들의 설교의 약점은 적용부분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 적용은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분석적이다. 대각성운동의 주역인 조나단 에드워즈도 강한 적용을 잊지 않았는데, 이러한 점에서 우리 교회의 설교자들이 겸손함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현대의 설교자들이 청교도들이 말하는 설교가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다. 순전한 복음전파,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설교, 경건한 목사의 삶, 구체적 설교의 적용, 거기다 신비롭기까지 한 설교자를 기꺼이 돕는 천사를 기억한다면 오늘 우리의 교회가 영적으로 각성하며 변화를 경험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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