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운동 이후의 부흥

- 그 퇴조와 부흥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상)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 제일교회)

현대의 교회들이 점점 침체기에 빠지고 있으며 우리는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침체기에 있던 한 특별한 시점에 성령께서 갑자기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것이 부흥의 역사다. 그 중에 청교도 신앙운동은 부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흥의 특징적인 요소를 가장 많이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부흥이 무엇인가라는 정의와 내용을 규정하고자 할 때, 이 용어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입장과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부흥이란 그 부흥이 올 때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며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부흥은 성령께서 영적으로 긴급한 상황에서 특별하게 교회생활 속에서 체험하게 하시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교회에 속한 지체들을 통해 나태하고 잠자고 있는 교회 지체들을 일깨워서 활기차게 소생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 지적으로만 진리를 깨닫던 것이 새롭고 더 심도 있게 깨닫게 되고, 삶의 전반에서 겸손하여질 뿐만 아니라 죄를 깨달아 더욱 깊은 회개를 체험하며 풍성한 구원과 그 능력을 깨닫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새롭게 생명의 능력을 얻게 됨으로 뜨거운 기도를 시작하며, 새로운 능력으로 말씀이 증거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구원을 받으며 회복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부흥이 바로 청교도 운동의 시대의 특징적인 역사였다고 할 수 있지만, 현대교회는 청교도가 가졌던 부흥의 특징적인 요소들이 퇴조되었다.

1. 근대 부흥의 역사가 왜 쇠퇴했을까?

필자는 이 쇠퇴의 이유에 대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과 “부흥”이란 책을 인용하여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와 가까운 근대 부흥의 역사를 추적해보자. 18세기 초엽에 독일 헤른후트와 모라비아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부흥의 물결은 미국으로 건너가 요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영국은 다시 휫필드와 웨슬리와 다른 사역자들을 통해 1790년에 이르기까지 부흥의 역사를 체험한다. 이때 조지 휫필드가 크게 쓰임을 받았는데 이런 약 70여년의 기간을 부흥의 시대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왜 영국의 교회가 쇠퇴했을까?

1) 그것은 개혁신학의 퇴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초기(1840년대)에 시작된 모든 현대주의 운동은 1860년대에 놀라운 속도로 번져 나갔고 개혁신학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주류를 이루던 신학은 대부분 칼빈주의였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이때에 교회가 부흥대신에 쇠퇴를 가져온 중심 원인을 찰스 피니의 부흥 프로젝트에서 찾고 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챨스 피니가 교회 부흥을 위해 교회 전체가 기도해야한다는 생각보다는 회의를 소집하여 복음 전도 집회를 조직하고 광고와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경향이 부흥에 대한 전체 시각과 사고 구조를 바뀌게 했다고 지적한다.

찰스 피니의 부흥신학은 매우 실용적이다. 그의 책 “진정한 부흥”은 열정과 능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가 제안한 부흥의 방법론들이 지금도 현대 교회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부흥신학은 존 엘리어스가 올바로 지적한대로 “인간의 전적 타락, 완고함, 영적 죽음의 상태와 오직 성령의 깨우치심과 이기게 하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으며” 부흥을 위한 인간의 주도적인 면을 강조하는 면들이 강조되었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의 학식이 더하면서 영적인 일에는 관심을 덜 기울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지적인 방식으로 사물과 환경을 파악해간다.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적인 면과 학식과 이해와 지식에 관심을 갖게 되어 결국은 성령님과 그의 역사를 망각하게 되고 부흥이라는 주제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매우 멀어져 간 것이다.

이안 머레이가 쓴 “마틴 로이드 존스 중기”라는 책자는 로이드 존스는 “금세기에 성령의 교리에 대해 씌여진 모든 책들에서 부흥에 대한 문구나 단락이 전혀 없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비록 저자들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지만, 실제적으로 사람 자신이 행하는 일과 사람이 조직하는 일에 더욱 집중하며 여기에 믿음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것은 사실 피니의 전도 집회와 그 추진자들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교리와 신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며, 또한 반대로 오직 교리와 신학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리와 신학에만 집중하면 무미건조한 정통 이지주의에 빠져서 자신의 영적인 삶과 교회의 삶에 대해 태만해질 위험이 있다. 특히 개혁파적인 관점을 취하는 우리 개혁주의자들이 항상 빠지기 쉬운 위험이 바로 이 신학에만 관심이 있고 지적으로만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기 쉽다는 점이다.

3) 부흥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이유 중의 하나는 19세기 현대주의를 대적하는데 지나치게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은 이 현대주의라는 대적을 격퇴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동안, 적극적인 메시지의 증거보다는 변증적인 요소가 가장 중요한 국면이 되어 버렸다. 18세기 초에 영국의 합리주의와 이신론이 나타났을 때에도 교회는 그것에만 관심을 갖고 변증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기독교 국교화 시대 이후에 복음 증거와 기도와 선교의 관심이 사라지고 이단에 대한 변증에만 편중했던 역사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4) 무엇보다 부흥에 대한 관심이 약한 것은 지나치게 감성을 무시하며 천성적으로 감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적 사고에 집중하는 신학적인 사람들은 감정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으로 치우친다. 감정을 나타낼 때마다 자신의 신앙적인 성향과 다른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이것이 반복될수록 감정에 대한 혐오감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불건전한 것으로 치부하기 쉽다. 그럴 때 심지어 개혁신학을 가진 자들조차도 균형을 잃고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할 수 있다. 오늘날도 오순절주의와 그 과도한 탈선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결과 성령의 특별하신 역사를 무시할 수도 있다. 이런 지나친 과민반응 때문에 성경에서 제시하는 체험에 대한 불균형의 위험성이 상존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해야 한다는 말씀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예민함과 민감함이 점점 약화되어 가는데서 부흥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퇴화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왜 우리 개혁주의가 부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 개혁주의가 부흥에 관심을 가져야 할 근거나 이유에 대해 필자는 성경에 충실한 근대의 개혁파 청교도라 할 수 있는 제임스 뷰캐년(James Buchanan)의 책을 주로 발췌 인용하였다.

1) 성령의 주권성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가 지향하는 개혁신학은 부흥의 요소를 제한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부흥을 사모해야 마땅하다. 제임스 뷰캐년(James Buchanan)이 1866년에 쓴 대작 [Τhe Office and Work of the Holy Spirit, 성령의 직임과 사역]이라는 책에서 “성령께서는 영광스러운 사역을 수행하시는데 있어서 어느 한 양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런 주제를 숙고할 때 성령의 주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부당한 편벽성을 가지고, 부흥은 모든 경우에 믿음의 기도에 대한 약속이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보다 갑작스럽고 획기적인 은혜의 역사를 배제시키거나 거부할 정도로 복음 사역의 조용하고 점진적인 성공만을 기대하지만, 그들은 불행하게도 성령의 주권을 지나치게 간과해 버린다”고 기술한다. 근대 미국의 청교도의 주도적인 지도자인 요나단 에드워드는 “인간이 타락할 때부터 오늘까지 효과적인 구속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성령께서 특별한 교통을 허락하심으로 수행되어 왔음을 관찰할 수 있으며, 비록 하나님의 성령께서 늘 교회의 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시지만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방법은 항상 특별한 긍휼의 때에 특별한 폭발을 통해서였다”라고 말한다.

부흥은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부흥을 위하여 역사하실 때에는 결코 한 방식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먼저 부흥을 위하여 성령께서 주도적인 사역을 하신다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부흥을 위한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의 법을 존중하면서 진리를 방편으로 역사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younsuk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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