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일년에 한 번 봄학기에 영성과목을 강의한다. 영성과목이 있는 학기에는 하루 날을 정해서 학생들과 함께 학교 가까이에 있는 피정센터에 가서 짧은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강의내용을 실천해 볼 시간도 되지만 바쁜 일상에 묶여서 자연에서 묵상할 시간을 따로 내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쉼의 기회를 제공해주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말리부에 있는 곳으로 주로 갔는데 코비드 때문에 2년 동안은 클래스 침묵훈련을 못 갔었다. 코비드가 많이 사그라진 덕에 이번 주에는 오랜만에 학생들과 씨에라 마드레에 있는 피정센터를 방문했다. 학교에서 가는 시간, 다시 돌아오는 시간을 계산하면 막상 침묵시간은 두 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일상의 활동을 멈추고 조용히 하나님과 대화하는 두 시간은 짧지만 소중한 시간이다. 학생들을 인솔해서 가는 입장이지만 반나절 피정을 갈 때마다 나는 설레는 마음이 된다. 클래스 덕분에 나도 자연 속에서 아무 서두름 없이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을 갖기 때문이다. 이번 침묵훈련은 특히 내 마음이 너무 복잡하고 힘든 때에 갖게 되어서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다.
피정센터에 도착해서 간단한 안내사항을 전달했다. 학생들은 침묵훈련 이후에 함께 저녁식사 하러 갈 장소를 정하느라 들뜬 마음으로 설렁탕, 칼국수, 딤섬 등을 후보에 올리며 마치 소풍온 어린 아이들 같이 즐거워했다. 두 시간 동안 각자 조용한 장소에서 침묵을 가진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익숙한 장소인 분수 안 쪽, 작은 뜰에 위치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등나무 그늘 밑이어서 햇빛도 어느 정도 가려지고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도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다양한 새들의 길고 짧은 지저귐도 평안한 오후의 감사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갑자기 오후의 정적을 깨고 낙엽을 부는 기계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길 아래쪽에서 정원을 돌보는 분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아 하필이면 왜 이 시간에 낙엽을 치우는 걸까, 정말 침묵하기 좋은 시간이었는데…” 기계 소음에 묻혀 더 이상 새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마음의 고요함도 깨져버렸다. 아쉬운 마음으로 언제나 소음이 그칠 것인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에 들렸다. “얘야, 네가 꼭 저 낙엽 부는 사람 같다. 먼지를 일으키며 길옆으로 낙엽을 불어 보낸다 해도 잠시 후 바람이 불면 또 다시 길가로 뒹굴어 나올 텐데 너는 네가 해결도 못할 일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구나. 네가 너무 분주하고 요란하게 구는 바람에 너는 내 세미한 음성을 못 듣고 있으니 네 영혼을 잠잠하게 하렴.” 모든 짐을 혼자 진 것처럼 고민하는 내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상한 꾸짖음이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소음 속에 산다. 사람들의 말 소리, 차 소리, 음악 소리, 그리고 내 마음 속의 잡음 등 우리 삶은 소리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많은 생각을 끌어안고 산다. 그래서 아무 소리도 없는 침묵의 시간을 힘들어한다. 침묵은 고독을 불러오고 고독은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생활도 돌아보면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해한다면 기도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도 포함되어야 할 텐데 우리의 기도는 일방적인 아룀, 간청, 그리고 탄원이 대부분이다.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침묵기도에 대해서 배운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참 모습을 대면하고 또 하나님의 얼굴을 아무 방해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침묵 속에 찾아오는 고독의 시간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적막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그러려면 우선 시간을 내어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시간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고 생산적인 결과를 최우선으로 하는 세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말 헛된 시간, 무익한 시간, 낭비 같은 시간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낭비라면 마치 옥합을 깨뜨린 여인 같이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을 낭비해서라도 아버지의 따뜻한 품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고귀한 낭비를 통해 우리 영혼에 참 휴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lpyun@apu.edu
04.0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