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과 타협

변명혜 교수

(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여름 방학 동안 가까운 산으로라도 며칠 가족휴가를 다녀올 수 있을까 했지만 결국 그런 시간을 찾지 못했다. 가족휴가 대신 막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어서 떠나기 전에 샌디에고 사는 큰 아들 집에 이박삼일 다녀오기로 했다. 가족이 함께 쉬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야구장도 가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아들 집 주변을 걸어 다니려니 건물마다 동성연애를 표현하는 큰 무지개 배너가 걸려있는 것이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띄었다. 샌디에고는 워낙 동성연애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어서 그 무지개 배너가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심지어 교회 입구 앞에도 길게 드려져 있는 무지개 배너가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마도 지난 6월이 “게이 프라이드의 달”이어서 동성연애를 지지한다는 뜻으로 무지개 배너를 다 걸었던 것 같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동성연애를 지원한다는 의사를 밝혀야 사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이해를 한다. 

그런데 교회에 걸려 있는 무지개 배너는 또 무엇인가? 만약 그 배너가 “우리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성 정체성에 상관없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 의미였다면 아무 이의가 없다. 그러나 그 배너가 “우리는 여러분이 동성연애자인 것을 지지합니다”라는 의미였다면 정말 답답한 마음이 된다.

동성결혼이 합법화 된 이후 동성연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에 대한 관용(tolerance)을 넘어 점점 더 적극적으로 영향력이 커져가고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어려운 이슈이다. “평등(equality)”을 강조하며 개인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명목 아래 결국은 성 정체성을 선택의 자유가 있는 영역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를 옹호하지 않으면 마치 지성인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간다. 그러나 평등법이라는 명목 아래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앞으로 우리의 도덕성은 참으로 도전 받게 될 것이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이 나의 행동의 기준도 맞고, 당신의 행동의 기준도 맞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니 굳이 한 가지를 고집하지 말자는 매우 근사하게 들리는 관용의 자세이다. 문제는 종교에도 상대주의가 들어와 진리가 무엇인지 그 정의가 애매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다른 종교를 포용한다는 뜻에서 불교, 개신교, 천주교, 이슬람교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성명을 발표한다든지, 행사를 하는 그런 일들이 이제는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물론 몇 년 전에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던 극단적 크리스천들처럼 불교사원에 가서 기물을 파손하는 그런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용납하자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인정은 해야 하지만 우리가 믿는 진리를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은 크리스천으로서 합당한 일은 아닌 것이다. 

한국에 계신 형부는 총각시절 집사님 직분을 받았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다가 요즘 가끔씩 교회 밥이 맛있다며 교회를 가신다고 한다. 밥은 멋쩍은 핑계일 뿐 기독교에 드디어 관심을 가지시나보다 하고 내심 기뻐하였다. 나이가 여든을 넘긴 형부가 주님 앞에 서기 전에 세례 받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최근에 Facebook에 올리시는 형부의 글을 보니 친구와 함께 절에 가서 108배를 했다는 둥 사찰에 대한 얘기를 계속 올리고 계셨다. 

우리 형부같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 기독교와 불교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났다는 사람이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그것은 관용이 아닌 타협이 될 것이다. 상대주의가 만연하는 시대에 말씀 위에 바로 서서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기준을 확고하게 붙잡고 살아야 갈 것 같다.

 lpyun@apu.edu

08.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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