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변명혜 교수

(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우리 모두에게는 친구가 있다.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소꼽친구, 학교에서 만난 친구, 그리고 성장한 이후 직장, 교회 등 같은 환경을 통해 만난 친구들이 있다. 친구의 순 우리말인 “벗”이나 “동무”는 요즈음에는 잘 쓰지 않는 옛 단어다. 특히 “동무”라는 단어는 북한에서 동지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바람에 이북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 길동무, 어깨동무 등 아름다운 뜻을 지닌 단어도 사라지게 되었다. 

몇 해 전 어느 사모님이 생일카드를 보내주셨는데 그 시작이 “함께 가는 길동무에게”였다. 섬기던 교회에서 사모님을 만난 지 이십 여 년이 지났다. 은퇴 후 선교의 길을 가시는 목사님, 사모님을 존경하며 후원하고 있기에 “길동무”라는 단어가 뭉클하게 와 닿았다. 길동무처럼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을 걸어갈 때 함께 격려하며 위로하고 같이 가는 사람이 친구다. 아무도 내 편이 없는 것 같은 때에도 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친구다. 그래서 친구는 우리의 삶에 힘이 된다. 

또한 친구는 사소한 일상 뿐 아니라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나눌 수도 있는 사람이다. 친구는 뜨거운 사막을 걸어 갈 때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해주는 나무 같다. 자주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친구가 살고 있으면 좋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괜찮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라고 하지만 친구에게는 그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 몇 년에 한 번 얼굴을 볼 수 있어도 친구는 친구다. 문득 보고 싶고, 안부가 궁금해서 일년에 한 번 소식을 나눈다 해도 친구라면 세월의 간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는 인간관계는 다양하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 얼굴이나 이름 정도를 아는 사람, 일상의 일을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또한 세상에는 나에게 호감을 갖는 사람,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 그리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골고루 있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몇 년 전에 어느 기독교 TV방송국에서 초청을 해서 두 차례에 걸쳐 비디오를 녹화했다. 최근 유튜브에서 우연히 그 비디오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싫어요”를 한 사람이 있었다.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싫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두 비디오에 똑같이 싫다고 한 사람이 한 명씩 있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열심히 “싫어요”를 누른 것 같았다. 누가 싫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 사람을 아는 것도 아니고 크게 상처받을 일은 아니어서 “와, 내가 정말 싫은가 보네” 하고 지나쳤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의 반응에 늘 신경을 쓰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피곤한 세상에서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친구다. 친구는 언제나 내 편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먼저 친구는 서로를 잘 알고 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등을 알고 이해한다. 또한 친구는 서로를 기뻐한다. 만나면 반갑고, 오랜 기간 못 보면 궁금하고 보고 싶은 사이가 친구다. 무엇보다 친구는 상대방의 연약함을 알면서도 덮어주고 사랑한다. 형제, 자매에게도 나누지 못할 마음의 비밀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친구다. “영혼의 친구”라는 말이 있다. 믿음 안에 서로를 세워주는 친구를 말한다. 일생을 살면서 영혼의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성경에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할 때 부부관계, 혹은 부 관계로 묘사하는 표현이 많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그 분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까지 내어 주신 우리의 가장 귀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늘 우리 곁에 계시며 언제나 우리의 최선을 응원하시는 그 분은 정말 우리의 참된 친구다. 주님이 부족한 나를 친구 삼으셨듯이 나도 그 분께 받은 사랑으로 내 삶에 선물로 주신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며 마음을 나누며 살기를 원한다. 코비드로 인해 얼굴 보기 힘든 소꼽친구의 생일을 늦게나마 축하하기 위해 오늘은 점심을 사 들고 친구 집 뒤뜰로 찾아가려 한다.

 lpyun@apu.edu

02.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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