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연습

변명혜 교수

(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올 가을에는 캘리포니아에 큰 산불이 유난히 많았다. 인명피해도 있었고 대기가 오염되어 한동안하늘이 뿌연 가을을 보냈다. 몇 주 전 남가주얼바인 지역과 요바린다에서 또 산불이 났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아침, 그 강풍을 타고 갑작스러운 산불이 얼바인 지역으로 확산되어서 십 만명이 대피해야 했다. 산불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온라인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강의를 거의 마칠 무렵에 갑자기 전화 비상 알람이 울리면서 우리 동네 쪽으로도 산불 위험이 있으니 대피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가 왔다. 우리 집은 얼바인에서 45분 정도 거리에 있지만 집과 가까운 요바린다에도 산불이 나면서 우리 동네 쪽으로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대피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급하게 수업을 중단했다.

지진의 가능성이 높은 남가주에 살기 때문에 지진이 나면 무엇을 챙겨야할지 평소에 생각을 하기는 했다. 막상 지진이 나면 뛰어 나가기도 바쁘겠지만 혹시 무엇을 가지고 나갈 여유가 있다면 모든 자료가 들어 있는 컴퓨터와 연락을 위한 셀폰, 여권, 그리고 손 때 묻은 성경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진이 아닌 산불로 갑자기 대피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내린 것이다. 짧은 시간에 무엇을 챙겨야 할지 미리 생각했던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다. 집이 불에 탈 수도 있다고 생각해도 막상 꼭 가져가야 할 것이 많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물건은 학교가 대여해준 작업용 컴퓨터, 책상에 오래 앉아 일해야 하는데 등과 허리가 안 좋아서 힘들어 하는 나를 위해 친구 목사님 부부가 올해 생일선물로 사주신 좋은 의자, 이번 초가을 산불로 공기 오염이 심해서 거금을 들여 산 공기정화기, 그 정도였다. 컴퓨터는 우선순위로 챙겼지만 부피가 큰 의자나 공기 정화기는 차에 싣고 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동안 바쁘게 산다는 핑계 아래 정리하지 못한 채 쌓여 있던 옛날 앨범, 박스에 담아 놓았던 가족사진들이었다. 세 아이들의 출생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시간들이 빼곡히 담겨 있는 삶의 기억들은 챙겨야 할 것 같아서 서류 가방 두 개가 꽉 차도록 사진들을 챙겼다. 대피 명령이 내리면 바로 떠날 준비를 한 채 기다리는 동안 밤이 되었다. 짐을 챙기느라 지쳐서 그랬는지 불안한 마음도 없이 잠을 잘 잤다. 감사하게도 불길이 주택가를 피해서 다른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이틀 후에 대피준비령이 해제되었다. 짐을 차에서 다시 꺼내 정리하고 나니 몸살기가 왔다. 급하게 물건을 챙기고 혹시라도 불길이 가까이 오면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느라 심리적, 육체적으로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산불로 인한 작은 소동을 벌이면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모든 것을 다 남겨두고 떠난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다시 한번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을 떠날 시물레이션 게임을 해본 것 같았다. 필요 없는 것에 너무 마음 두지 말고 가볍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준비할 시간이 있는 죽음을 맞으면 조금 더 여유 있게 삶을 정리하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얘야, 이제 그만 가자”고 하시는 하나님 음성을 들으면 내가 가지고 갈 것은 컴퓨터도 사진도 아닐 것이다. 이 땅에서 사랑했던 기록들만 지니고 떠나갈 것이다. 또한 내가 떠난 자리에 남겨 놓을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곁에 두신 사람들을 사랑했던 자취일 것이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산불 덕분에 약식이지만 떠나는 연습을 해볼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하다. 잠시 대피하는 것이 아닌 영원한 본향으로 부르실 때 훌훌 털고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늘 준비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lpyun@apu.edu

11.1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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