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몇 년 전에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어느 집 앞에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새로 심은 것이 보였다. 나무 밑에 “사꾸라”라는 팻말을 붙인 것을 보고 그 나무가 벗꽃나무인 것을 알았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 나무에 꽃이 필만큼 자랐을 때 동네 아저씨가 나에게 그 나무의 사연을 말해주었다. 그 집의 아내 이름이 사꾸라였는데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남편이 아내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앞뜰에 사꾸라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들이 가끔 집 앞에서 보이는 것으로 봐서 그 아내는 40대 즈음에 세상을 떠난 것 같았다. 집을 드나들 때마다 나무를 지나가야 하니까 아마도 그 남편은 아침, 저녁으로 나무를 보며 아내에게 안부 인사를 건넬 것 같다. 그 이후로는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아내를 앞서 보낸 남편의 안쓰러운 마음이 전해진다.
부부 사이를 일컫는 여러 말이 있다. 천생연분, 백년해로 등이다. 수많은 사람 중에 단 한 사람 만나 결혼을 하니 천생연분일 것이다. 또한 문자 그대로 백년은 아니겠지만 부부의 연을 맺은 후 한평생을 사이좋게 지내고 즐겁게 함께 늙어가라고 백년해로 하라는 말로 축복해준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잘 살라는 말도 있다. 젊은 날 만난 부부가 평생을 오손도손 잘 지내고 노년기를 서로 의지하며 함께 하는 것은 큰 복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천생연분 대신 평생원수라는 말도 있고 황혼이혼, 졸혼 등 옛날에는 있지도 않았던 신조어들이 나오고 있다.
황혼이혼은 말 그대로 인생의 황혼기에 배우자와 헤어지는 것이다. 철없는 젊은 부부가 결혼 후 적응기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이혼하는 것이 아닌 오랜 기간 함께 살아온 부부가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경우다. 오죽하면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혼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어쩐지 씁쓸한 단어다. 또한 결혼관계는 형식적으로 유지하지만 각자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부부가 각각의 삶을 즐긴다는 졸혼은 더 황당한 단어다.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에서 졸혼이라니 졸업의 의미가 많이도 왜곡된 것 같다. 졸업은 일정의 과정을 잘 마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형식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어떻게 결혼을 졸업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부부관계가 위태로운 시대를 살면서 부부의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최근에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노래를 들었다. 오래 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광석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이다. 요즈음 같은 장수시대에는 이 노래 제목을 “어느 80대 노부부 이야기”로 바꾸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신혼 시절부터 인생을 함께 하며 기쁜 일, 어려운 일을 함께 겪은 남편이 죽음을 앞 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애절한 마음을 노래한 곡이다. 나이가 들은 탓인지 그 곡을 들으면서 아내를 앞서 보내는 남편의 슬픔이 느껴져서 눈시울이 젖었었다.
어느 부부가 평생을 마냥 좋기만 할까? 미울 때, 짜증날 때, 마음에 안 들 때도 많지만 긴 세월을 함께 하다 보니 서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측은하고 안쓰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코스타 사역에 동참하는 어느 교수님이 있다. 그 분과 개인적으로 친교를 나눌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 교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완전히 학자 타입인 분이다. 그룹 카톡에 있는 그 분의 프로필 사진을 보니 파파노인이 된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 올려져 있었다. 인생의 길동무인 부부 모습을 그린 그 사진이 주는 푸근함과 따뜻함이 그대로 다가와서 빈틈이 전혀 없을 것 같던 교수님이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 그림처럼 함께 삶을 나누면서 쌓인 서운한 것, 미운 것을 털어버리고 주님이 부르실 그 날까지 손 꼭 잡고 서로 의지하며 가는 부부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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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