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두 주 전 출근길에 동료직원으로부터 내가 오래 전에 가르쳤던 옛 제자 권사님이 소천했다는 말을 들었다. 가끔씩 소식을 주고받던 사이여서 두 달 전 쯤에도 통화했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서 확인을 부탁드렸다. 권사님 번호로 전화를 해보았더니 전화번호가 끊겨 있어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주에 동료직원은 그 분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이 사실이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제자 권사님을 만난 것은 이십여 년 전이다. 그 당시 재직했던 학교에는 유아교육을 위한 자격증을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가끔은 나이가 든 학생들도 등록을 하는 바람에 그 권사님은 나보다 십년 나이가 많으셨지만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다. 그 분은 음식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좋아해서 교회청년들 행사 때면 야채 스프를 잔뜩 끓여서 청년들을 대접하곤 했다. 우리 집 가까이 사셨던 덕분에 야채스프를 많이 만드는 때는 나에게도 갖다 주셔서 우리 아이들은 그 분을 “베지터블숩 레이디”라고 불렀다. 내가 베지 레이디 권사님을 만났을 때는 이미 장성한 아들 둘을 결혼시켜서 남편하고 두 분이 살고 계셨다. 졸업 후에도 가끔씩 그 분 댁에 초대 받아서 식사를 하기도 했고, 바쁘게 지내느라 우리 집으로 초대하기 어려웠던 나는 밖에서 두 분에게 식사대접을 하기도 했다. 두 분은 몇 년 전에 살던 집을 정리하고 작은 아들이 사는 다른 주가 집값이 더 싸다고 아들 곁으로 이사를 했다. 가끔씩 전화해서는 나에게 꼭 한번 새 집에 놀러오라고 했지만 바쁜 일상을 살면서 이사한 곳에 찾아 뵐 시간의 여유는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한 권사님은 며칠 간 우리 집에 머무를 수 있을지 물어보셨다. 그동안 참고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털어놓으시는 말에 나도 충격을 받았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이혼이야기가 나왔고, 나도 권사님의 이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용기를 드렸다. 교회에서 가정사역을 담당하고 있고 사람들이 결혼문제로 상담을 신청하면 어떻게라도 가정을 지켜보도록 권면하지만 권사님 경우는 그럴 수 없었다. 결국 권사님은 이혼을 결정했다. 흔히 말하는 황혼이혼 후 언니가 살고 있는 타주로 가셔서 그런대로 잘 지내셨다.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니 놀러오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그럴 여유를 찾지 못했다. 권사님의 언니가 다른 주로 이사를 하게 되어서 그곳까지 따라가기는 그렇다고 일년전 쯤에 다시 아들과 옛 남편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옛 남편이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한 후 권사님은 많이 힘들어 하셨다. 가까이에서 살면서 손자, 손녀들 생일, 졸업식 이런 날에 옛 남편 얼굴 안 보고 살기도 힘들고, 먹는 것도 부실하게 지내는 남편이 신경 쓰이기도 하셨던 것 같다. 나에게 전화해서는 며느리 편에 옛 남편에게 반찬을 해보내면 어떨지 물어보셔서 “권사님 마음이 힘드시구나” 짐작했었다. 작년 12월 초에 전화를 하셔서 추수감사절에 아들들, 손자, 손녀들이 와서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기뻐하셨고, 바쁘게 지내는 내 건강 염려를 해주신 것이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몰랐다.
마음이 힘들어서 전화하셨을 때 조금 더 길게 통화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조금 더 자주 안부 전화를 했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미 떠나간 그 분의 갑작스런 죽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권사님의 큰 아들과 통화를 했다. 아들이 모르는 어머니에 대한 좋은 추억을 나누고 싶었다. 우리들의 삶에는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직장을 옮기기도 하고 이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마지막 헤어짐인 죽음은 언제, 어떻게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곁에 있을 때 얼굴을 볼 수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 마음을 담은 전화라도 자주 나누며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여기 저기 오래 소식 못 전한 지인들에게 전화를 했던 주간이다.
lpyun@apu.edu
03.1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