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에 절대 절망은 없습니다

노창수 목사

남가주사랑의교회 담임

오래전 영화 ‘쇼생크 탈출’을 감명 깊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인공 앤디는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누명을 벗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20년 만에 탈옥에 성공합니다. 반면에 앤디의 교도소 ‘절친’인 레드는 40년 만에 가석방을 받았지만 살 길이 막막하여 자살 충동을 겪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앤디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꿈, 희망, 꿈을 갖고 살던가 희망 없이 죽던가. 희망에 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 나는 내가 무사히 국경을 넘었으면 좋겠다. 내가 국경을 넘길 희망한다. 앤디를 다시 만나서 포옹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3주간 살 수 있고, 물을 마시지 않고도 3일을 버틸 수 있지만 희망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의 책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에서 “나치 수용소의 말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바로 희망이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희망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반면에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키르케고르)에 빠지게 됩니다.

절망은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절망은 마지막 버틸 수 있는 힘마저 삼켜 버리는 괴물입니다. 절망은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해질 무렵에 시작해서 그 다음날 해질 때까지입니다. 창세기 1장이 인류 최초의 ‘하루’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두운 밤에서 밝은 아침으로 인도하시는 분, 절망의 밤에서 소감의 아침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망의 줄을 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살 소망의 줄을 붙잡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산 소망’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해 주십니다. 절대 절망 중에 있었던 우리에게 절대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 즉 굿 뉴스(Good News)입니다. 복음은 절망 중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소망의 밧줄입니다. 구원의 선물입니다. 절망이란 암세포를 죽이는 명약입니다. 절대 절망에서 절대 소망으로 인도하는 생명줄입니다. 산 소망입니다.

절망 중에 있으십니까? 주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절대 절망은 없습니다. 오직 절대 소망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망의 끈을 놓고 ‘산 소망’이신 예수님을 붙잡으세요. 절망의 밧줄에 꽁꽁 묶인 사람을 아십니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아십니까? 그들을 위하여 일어나 빛을 발하는 성도가 되시지 않겠습니까? 그들에게 절대 절망에서 절대 소망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전하는 미셔널처치가 되시지 않겠습니까?

02.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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