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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밧 과부의 삶

(열왕기상 17장)
강기봉 목사

(뉴욕백민교회 원로목사)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이래,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남은 자’를 통해 지금까지 역사하고 계신다. 홍수 심판과 바벨탑을 흩으심과 같은 대형 사건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참된 믿음의 삶을 연결고리로 하여 구속역사를 이어가신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대물림처럼, 지금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작고, 소수인 사람들을 통해  하시고자 하시는 역사를 이루신다. 나는 오늘 사르밧(사렙다) 과부의 삶을 돌아보면서, 어떤 공동체나 ‘사람들’ 보다 나 자신이 무엇을 배우고 새겨 살아야 할지를 찾고 싶다.

열왕기상 17장은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수년 동안(3년반) 북이스라엘에 가뭄이 있을 것을 예언함으로 문을 연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의 살기를 피해 그릿 시냇가로 가서 숨게하고, 그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들을 통해 아침과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먹게 하신다. 시내가 마르매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의 공궤를 받게 하신다. 사르밧은 두로와 시돈 사이의 작은 마을로, 신약시대에는 사렙다로 불리웠다(눅 4:26). 이 지방은 바알숭배의 뿌리와도 같은 간악한 여인 이세벨의 고장으로, 북쪽 이스라엘 왕과 혼인하여 우상숭배를 퍼뜨리고 있는 곳이다. 사르밧 과부는 이런 우상숭배의 용광로와도 같은 곳에 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 그 믿음을 지켜왔다. 

성경에서 과부는 언제나 측은하고 약하게 보여 구제대상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과부를 통해 아주 소중하고 고귀한 삶의 방법, 삶의 지혜를 배우게 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오는 지혜는 차별없이 임한다. 엘리야가 떡을 요청했을 때 과부가 대답한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7:12)’ 죽음을 말하는 표현치고는 무척 담담하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리아산을 향하여가며, 아들 이삭과 나누는 아브라함의 표현을 생각나게 한다(창22:1-8). 과부로서 삶을 지탱하게 한 아들의 죽음인데도 평화롭게 받아들인다. 과부는 엘리야의 요청대로 그 마지막 남은 한 끼분으로 먼저 엘리야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바쳤는데, 신기하게도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도 떨어지지 아니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악속을 따름으로 과부의 생계문제도 풀어줄 수 있었다. 모든 생계문제도 먼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풀려간다.

얼마 후 과부의 외아들이 병들어 죽었다. 과부가 엘리야를 찾아 한 말을 보자.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7:18)’ 과부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옆에 모시고 지내는 동안, 그동안의 자신의 삶이 죄에 오염된 면이 많음을 보게 된 것이다. 물질 위주의 신 바알이나 섬기며 그저 마음 돌아가는 대로 살아가는 두로와 시돈 지역 사람들만 보며 살 때는 보이지 않던 자신의 부족한 면이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존재다. 과부는 비록 삶이 쉽지않은 중에도 생각하며, 보며 살아갔다. 그러는 중에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된 것이다. 엘리야를 가까이 한 덕분이기도 하다. 엘리야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힘을 다했다. 죽은 외아들을 안고 자기의 침상에 뉘우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17:20)’ 하고,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다시 돌아오게 하옵소서(17:21)’하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고 혼이 아이의 몸으로 돌아와 살게 하셨다(17:21-24).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항상 말씀을 따라 사역하는 사람과 그 말씀의 수혜자와 그리고 하나님 이렇게 셋이 최선을 다하는 데서 일어난다.

사르밧 과부가 보여주는 가장 소중한 교훈은 그녀의 물질관이다. 과부의 마음에는 물질과 외아들과 하나님, 이 세 요소가 꿈틀거렸다. 과부는 이 중 하나님을 택했다. 그 결과 세가지 모두가 살아 남았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큰 질서 가운데 두셨는데, 그 질서는 첫째 하나님, 둘째 인간, 셋째 만물 곧 물질이다. 인간의 행복은 이 질서를 따라 사는 데에서 가능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지은 인간을 얼마나 섬세하게 보살피시는가를 이해하기 쉽게 말씀해 주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들풀을 보라(마6:26). 사람이 편견이나 자기대로의 선입견에 잡히지 않는다면 이해하기 쉽고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는 말씀들이다. 동시에 성경은 물질을 믿고 하나님도 없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살아가는 많은 경우도 소개하고 있다. 나발(삼상 25:2-38), 어리석은 부자(눅 12:15-21) 등 수없이 많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십계명을 비롯해서 수많은 계명들을 어려서 부터 지켜 살던 사람 이야기도 있다. 그래도 마음에 확신이 들지 않았던지 에수님께 나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가서 너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그는 재물이 아까워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했다(눅 18:18-23). 하나님을 물질과 바꿀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의 마음은 모르는 사이 물질에 매여버린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물질은 많은 사람의 마지막 주인 노릇을 하는 것도 같다. 그렇게 되도록 방심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물질을 부정적으로 여기시는 분 처럼 보이기가 쉽다. 절대 그렇지 않다. 물질도 하나님이 지으시고 기뻐하셨다. 자기를 경외하는 백성에게 물질의 번영과 장수의 복을 내리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다. 사람의 본성 속에 물질에 대한 탐심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신 하나님은, 그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고 40년을 훈련하셨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아침 저녁으로 내려주심으로, 백성이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았지만, 결코 굶주려 죽는 자 없게 하셨다. 

그 광야 40년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하심 (신 8:3)’이었다.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 부부에게 이마에 땀을 흘려야 살도록 하신 것은, 사람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시는 보호책이요, 절실한 사랑의 표현이다. 사람은 자기 먹을 것, 자기 잠잘 것, 입을 것은 스스로 챙길 줄 알아야 한다. 자기의 흘리는 땀 없이 살려 할 때 감당 못 할 비극에 처하게 된다.

한 남성이 30대 초반에 직장에서 일하다가, 한쪽 눈이 거의 실명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얼마 되지 않아 국가에서 인정하는 장애인으로 분류되어 월 450만 원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고등 수입자가 월 100만 원을 받을 때였다. 이 사람은 도로 통행료, 주차료 등을 비롯해서 많은 경우에 절반을 내며 살았다. 두 내외가 하던 일도 그만두고, 국가나 지방 단체에서 경매 건등이 나오면, 장애인 우대 정책을 따라 좋은 기회를 많이 누렸다. 그런데, 이런 삶이 결국에는 비참하도록 우그러지고 조각이 났다. 부부가 서로 돈 씀씀이에 비밀이 생기더니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남남이 되고 말았다. 아들 둘이 있지만, 연락처도 모르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물질로 산정하는 경향이 짙다. 예능과 예술까지도 ‘수입은 얼마나 올리고 있느냐’는 말을 농담인지 진담인지 해댄다. 요즘 축구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데, 그 선수 얼마나 받고 그 팀에 갔는가가 첫 관심사다.

사르밧 과부의 삶은 약하고 초라했지만, 하나님 눈에 띄는 삶이었다. 선지자의 대명사와도 같은 엘리야를 보내셔서 의탁하게 할 정도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여인이었다. 하나님이 쓰실만한 ‘남은 자’는 언제 어디에나 있다. 비록 세상의 눈에는 띄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눈에는 띄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은 너무 세상사에만 민감하게 움직인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뒤지기 싫어한다. 그런 풍조에 휩쓸리다 보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아무리 눈에 띄도록 앞서 달려도 남는 것이 없다. 남는 것 있는 인생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비록 한 끼 먹을 것 밖에 가진 것 없이 살던 사르밧 과부였지만,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셨기에 위대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 과부의 마음에 하나님이 은은하게 자리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자. 여기 우리도, 또 나도 그런 고귀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런 기회를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3-34)’

kangkibong@hotmail.com

06.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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