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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거룩성을 지켜라 (사도행전 4: 36–5: 11 )

백운영 목사 (GP 선교회)

한국 국적 항공사 매뉴얼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비상사태 때는 반말을 쓰라”왜 그렇죠?  급한 상황이라 말하는 속도를 줄이려고 할까요? 편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한국인들은 존댓말을 쓰면 긴장감이 떨어지고 장난인줄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태가 악화될 때 승무원의 명령이 절대적어야 할 때는 대상이 누구이든 관계없이 “일어나, 고개 숙여, 돌아 보지마, 짐 두고 빨리 움직여, 뛰어 내려”라고 명령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경각심을 가지고 빠른 속도의 대피가 가능하다는 것이 임상을 통해서 확인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국적 항공사만이 아닙니다. 서구 항공사도 비상사태 때는 단호하게 명령형 언어를 사용하라고 합니다. 상냥한 언어를 사용하면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Get down, Don’t take your luggage, Go out, Now Jump! 그래야 사람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명령대로 따른답니다. 이것이 몸에 배지 않았으면 평소에 그런 훈련을 시켜서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효율적인 대피를 할 수 있도록 승무원의 권위를 가지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매뉴얼이지요? 

비상사태 때 승무원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고객 있을 때는 남자 승무원 다가가 입을 막고 손을 묶을 수도 있는 권위를 줍니다. 사람들이 목숨이 일각에 달려있는데 한사람의 불평이 일파만파로 다른 사람의 불평을 이끌어 내기 때문 입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함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잘못된 상황 판단이 여러 사람의 소중한 목숨과 맞바꾸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냥 시간을 지체한 것만이 아닌 것이죠. 남을 죽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비상 때는 본때를 보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이것은 초대 교회 때도 동일한 상황 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 처음 교회가 세워 지면서 교회 안에 경건함과 정직함의 경각심이 필요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악이 경미하게 넘어갔다면 그 이후에 세워진 교회들은 죄성을 벗어 버리려는 간절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마음의 자세가 바르게 세워지지 못했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 삶을 혹독하게 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깨어 있으라, 경각심을 가지라는 것이죠. 때론, 분명한 본보기를 통해서 깨어나게 되고 그것이 결국은 모든 공동체에 복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 발 앞에 두었는데 그 일로 인해 죽음 맞이하게 된 스토리죠. 그들은 자신의 땅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했지만 중도에 마음이 바뀐 것 입니다. 그리고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만 가지고 사도를 찾아갑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말이 거짓인 것을 알고 기회를 줍니다. “이것이 전부냐?” 아나니아는 뻔뻔한 거짓말을 계속 이어가고 결국 그 자리서 엎드러져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3 시간 지나 아내 삽비라가 사도들 앞에 옵니다. 그리고 남편처럼 동일한 거짓말을 하고 결국 삽비라도 죽고 말았습니다. 

이 부부가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우리는 4장 마지막을 보면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36절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에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요셉이란 사람이 무엇을 했다고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밭을 기꺼이 팔았습니다.  그 전부를 사도들 발 앞에 가져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해 달라 부탁 했습니다. 아마 이것을 당시에 많은 감동과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죠.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사건을 보면서 자신들도 그렇게 박수 받기 원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 입니다. 그들의 동기는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죠.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만들어진 헌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고자  헌금했지만 사실, 아까웠던 것이죠.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셔야만 했나요? 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헌금을 다 드리지 않았다고 생명을 거두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본문 3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저주받아 죽음을 맞이했습니까? 거짓말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죽은 것은 소유의 전부를 드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거짓된 마음, 거짓된 믿음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교회에 순결성을 유지하시기 위해 교회에 경고하신 것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오늘 교회에게 여전히 하시려는 말씀과 교훈이 무엇인가 배우기 원합니다. 두 가지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거짓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과 참된 신앙은 서로 동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거짓말 한번 안 해 본 사람 어디 있나요? 그리고 거짓말 했다고 다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여기 살아남을 사람이 대체 있을까요? 성경은 한두 번 실수로 하는 거짓이 아닌 반복적으로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그냥 삶의 한 부분처럼 나오는 거짓말, 일상적으로 말만했다 하면 거짓이요, 자기 자랑이요 부풀리고 뻥튀기하고 자기 유익만 구하는 새빨간 거짓말에 속박된 사람이 있어요. 그런 행위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단호하게 대하신다고 합니다. 왜요? 거짓말은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기 때문 입니다. 베드로의 견책이 4절에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 께로다” 그 말은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다는 중대한 지적입니다.

오늘날 교회서도 누가 아나니아처럼 헌금 했다면 아마 칭찬과 인정을 받았을 것 입니다. 땅을 팔고 그 값을 다 바치지 않고 얼마만 드리고 나머지는 자기가 가졌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액수와 헌금의 크기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드렸는가로 감동받지 아니하신단 말이죠. 드리는 마음의 동기와 그 안에 담겨있는 헌신과 사랑의 모습에서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을 잘 알아야합니다. 양과 정도가 아닌 마음이요 정성을 보십니다. 그렇다고 이제는 헌금 액수를 대폭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헌금의 의미와 의도를 잘 알아야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 헌금은 내 인생의 주인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는 우리의 신앙 고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사람들 보라고 드렸습니다. 그들은 소유를 팔아 헌금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체면 때문 이었고 존경을 받기 위한 수단 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 자신이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죄 성에 의해서 죄인이란 것을 의식 하지 않습니다. 구원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회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회심의 과정도 없이 교회만 다니면 우린 이런 사람들을 종교인이라 부릅니다. 기억하세요. 교회 안에 들어와 참된 신앙을 갖지 못한 채 종교인으로 살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착각 했던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거짓말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행위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워렌 위어스비 목사는 “정직의 위기”란 책에서 남에게 거짓말 하는 것은 영적인 어두움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거짓말이 계속되면 이제는 꾸며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삶의 방식이 되어 남을 속이는 위선과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삶의 결과가 열매로 나타나고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 됩니다. 왜 우리는 계속 거짓말을 합니까? 그것은 우리를 속이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죠. 3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합니까? 그들이 성령을 속이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탄의 존재를 분명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 본 장면이지요? 창세기 3장에 거짓의 명수인 사탄은 그때부터, 후에 초대교회 때도, 아니 지금도 계속 사용하는 무기가 바로 거짓말 입니다. 우리가 그 거짓에 속고나면 우리도 거짓말의 명수가 되어 사람들이 주는 박수와 높임에 반응합니다. 왜 인류가 타락했나요? 모든 발단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욕심의 마음은 사탄이 노략질하기 가장 쉬운 놀이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 마음을 헤집고 마음대로 놀면서 주변에 악한 영향을 주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은밀하게 행한 모든 것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모두 다 드러나게 될 것 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탄의 꾀임에 속은 것이고 속이는 자가 된 것이죠. 요한복음 8:44은 죄 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진리가 그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때 마다 제것으로 말하니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성경은 사탄을 거짓의 아비로 소개합니다. 사탄이 “우는 사자같이 삼킬자를 찾나니”우리가 매일 하는 영적인 싸움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욕심은 믿음과 반대 길을 가도록 합니다.  짐 엘리엇이 남긴 명언이죠.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복음을 위해 에콰도르에 있는 아우카족에게 가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세상을 버리는 자가 바보같이 보였지만 영원한 것을 향하여 세상 것을 버린 자의 삶은 영원토록 빛나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영원하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한 것을 버린 자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두려움 주었습니다. 11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여기서 두려움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의 교회를 경이롭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로 교회 일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내 삶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매일 간구하면서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으로 긴밀하게 교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차츰 성숙해지고 세상 욕심보다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이제 앞으론 “죄 짓지 말아야 겠다, 경건하게 살아야 겠다, 착실하게 헌금생활 잘 해야겠다.”라고 결론 지으면 안 됩니다. 오늘 가르침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아닌 우리 마음을 살피라는 가르침인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의와 공로를 앞세우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는 자들 이죠. 은혜를 통해서 매일 나의 동기를 점검하고 내가 혹시 하나님보다 세상에서 주는 명예를 더 원하고 있는가를 점검 하고 그 은혜의 보좌 앞에서 확인할 때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이란 내 혼자의 힘으로선 불가능하지만 예수님의 손길에서 죄를 이기는 것도 가능하고 매일 승리하는 것도 가능하단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 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로 이겨내며 은혜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주 한인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gypae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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