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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입장에서 현대신학 비판 (12)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Ⅷ. 해방신학 (Liberation Theology)

 

해방신학은 20세기 후반에 세계적으로 상당히 널리 퍼졌다. 한국에서도 민중 신학의 이름으로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해방신학의 개념들은 몰트만 (Jűrgen Moltmann), 판넨페르그 (Wolfhart Pannenberg) 그리고 존 콥 (John Cobb), 슈벌트 옥덴 (Schubert Ogden)과 같은 과정 신학자들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나타난다.

해방신학은 주로 남미, 미국의 아프리카계, 페미니스트 등 여러 사회적인 운동의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났다. 해방신학의 중요한 학자들 가운데 가장 중심된 인물은 구티에레즈(Gutierrez ,1928–)이다. 흑인 신학은 인종에 많은 초점을 맞추고, 페미니즘은 성별에 더 초점을 맞추는 반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집단은 억압하는 집단과 억압받는 집단 사이에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it is a question of relations between one group considered oppressive and another considered oppressed). 그들은 성경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관점(the perspective of the oppressed)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방신학자들은 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사회-정치적 행동 (socio-political action)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사회- 정치적 행동은 필연적으로 “갈등”의 요소가 있다고 이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이익을 위한 일에는 필연적인 갈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 필연적인 갈등 (inevitable conflict)의 개념은 주로 마르크스 사상과 해방신학에서 다룬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어느 한쪽의 편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티에레즈의 방법론은 상당히 호전적이다. 그러나 구티에레즈는 그러한 호전적인 태도가 반드시 증오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때로는 적의 이익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모든 신학은 억압과 해방의 축을 중심 (the axis of oppression and liberation)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경우를 출애굽 사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노예 생활에서 구출하신 일,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요구하는 율법과 선지자에게 초점을 맞춘다고 주장한다. 

구티에레즈는 마르크스주의가 억압과 해방 갈등 (the oppression/liberation conflict)을 계급투쟁 측면에서 가장 잘 분석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자는 적어도 “분석 도구”(analytical tool)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잘 알아야 한다고 한다. 

구티에레즈는 로마 카톨릭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바티칸에 의해 정죄되었다. 해방신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하여 신학자들과 교황을 포함한 주교들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다. 구티에레즈가 마르크스주의에 전적인 헌신된 자는 아니겠지만 그의 사상과 행동은 마르크스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해방신학의 궁극적인 목표와 마르크스의 목표는 거의 동일하다.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에 따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not to understand the world, but to change it). 그는 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시대의 사회적 갈등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방신학은 “세속화의 신학”(theology of secularization)의 많은 개념과 수사법을 차용했다 (특히 몰트만과 하비 콕스). 구티에레즈는 우리가 세속화를 향한 현대의 발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비전과 일치한다고 했다. 그는 교회를 세상의 관점에서 (in terms of the world)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교회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세상을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세상을 섬겨야 한다고 했다. 그는 속된 것과 신성한 것 사이에는 궁극적인 구별이 없다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세속과 신성함 (the sacredness of the profane)의 공존을 주장했다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66-68).

구티에레즈는 신학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몰트만의 주장을 따르지만, 그는 성경적 그리고 역사적 사례를 인용하면서 몰트만의 개념보다는 현재 상황 (the present situation)에 더 많은 초점을 둔다. 

구티에레즈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주장하지만, 두 경우 모두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하나님은 초월적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행동하신다는 점에서 내재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류 안에 그리고 인류와 함께 존재하시며, 하나님의 임재는 보편적이다(His presence is universal)라고 했다. 즉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그의 임재는 보편적이라했다. 특히 그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이웃”안에 거하신다. 하나님과 연합하려면 우리는 “이웃에게로 개종” (“we must be “converted to the neighbor”) 해야 한다. (Ibid., pp. 189-207).

구티에레즈는 인간의 본성에는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개방성 (an infinite openness to God) 이 있다고 하며 (Ibid., p.69).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는 반대 개념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 사이의 경계는 유동적 (fluid)이다. 구원은 사회적 계층의 분리 및 구분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고 한다. 죄는 이웃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인간이 개인적으로든지, 집단 사회의 구조(structures of collective society)에서든지 가난, 불의 그리고 억압이 죄의 근원이다. 구티에레즈는 개인 소유와 죄 사이의 마르크스의 상관관계를 언급한다. 마르크스의 견해에 따르면 사적 소유 때문에 (private ownership),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의 성과로 부터 소외된다 (alienated from the fruit of his work). 그러나 구티에레즈(Gutierrez)는 이 상관관계를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Ibid., p. 87. Footnote 98).  

대부분의 해방신학자들은 몰트만처럼 하나님께서 미래에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도록 자극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기적, 속죄, 부활은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해방 신학자들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동안 정치적 행동에 참여하지 않으셨던 이유에 대하여 상당한 에너지를 쏟는다. 구티에레즈는 예수님에게는 열심당 혁명가들의(the Zealot revolutionaries) 친구가 있었다고 지적한다(Ibid., pp.226-7). 그리고 예수께서 정치적 행동을 자제하신 이유는 (1) 그분의 사명은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보편적인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2)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열심당의 태도와 달랐다. (3) 그는 왕국이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오는 것을 보았다. (4) 예수님은 형제애의 부족이 정치적 문제의 근원으로 보았다. (5) 예수님은 정치적 행동의 자율성을 존중했다.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예수의 혁명이 열심당의 혁명보다 더 급진적이었다고 말한다. 예수의 메시지는 마음을 향한 것이며, 구조적 변화를 가장 잘 이끄는 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해방신학자들에 따르면, 개인의 구원의 은혜만을 강조하는것은 사회 문제의 관심을 파괴한다. 그러나 억압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이기심과 죄를 해방 시킨다. 그러므로 신성한 일과 세속적인 일을 함께해야 한다(sacred and secular work together).

구티에레즈는 교회는 “보편적인 구원의 성례” (the universal sacrament of salvation)이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지향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교회는 세상의 본성을 드러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과 마찬가지로 구티에레즈도 “콘스탄티안 모델” (교회와 국가를 동일시하여 기독교국가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고, 교회는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며, 세상으로부터 그 의제 (agenda)를 취해야 한다는 세속 신학의 개념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난과 싸우기 위해 동원되어야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남미의 빈곤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며, 기독교인은 사회를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가기를 촉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하여 폭력이 필요 될 수있다. 구티에레즈는 경제적 억압 그 자체가 폭력의 결과이므로, 그러한 억압을 제거하는 것이 “대응하는 폭력” (counter-violence)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pp. 88-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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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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