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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조석진(1872-1937)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조석진(趙石珎)은 1872년 7월 11일에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덕원면 남산리라고도 하고 전라남도 순천이라고도 한다. 그는 31세가 되던 1903년 11월에 한국에서 세례를 받고 장로교인이 되었다. 아내를 한국에 남겨두고 단신으로 제물포를 거쳐 1904년 6월 25일에 일본 고베에서 그는 하와이 노동 이민선 몽고리아를 타고 33세가 되던 1904년 7월 8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그는 Cho Suk Gin 또는 Cho Suk Chin으로 통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조석진은 가와이섬 가파로 이동하여 농장에서 노동하였고, 1910년에 가와이섬 막가웰리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으며, 그 후 오아후섬 호놀룰루로 이주했다.

 

호놀룰루 제일 한인감리교회 권사

 

1916년 2월 17일부터 나흘 동안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1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감독 윌슨 S. 루이스 목사의 사회로 모였다. 이 연회에서 조석진은 안원규와 윤기상과 함께 호놀룰루 제일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고, 담임목사로 송헌주 목사가 파송을 받았다. 조석진이 하와이에 온 지 13년이 되던 해였다. 

그해 호놀룰루에는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네 감리교회가 더 있었다. 백인교회인 제일감리교회와 필리핀교회인 퀸 스트리트 감리교회가 있었고, 일본인 감리교회가 두 교회였는데 하나는 리버 스트리트 감리교회였고, 다른 하나는 사우스 킹 스트리트 감리교회였다.

조석진이 권사로 파송되던 해 호놀룰루 제일 한인감리교회의 교세는 아래와 같았다. 세례교인은 138명이었고, 학습교인은 85명이었으며, 유아세례교인은 16명이었다. 주일학교가 두 곳에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13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이 175명이었고, 엡워스 고등부에 38명이 등록하였다. 예배당과 사택이 있었고, 당시 시가는 32,000달러였다. 지난 한 해 동안 예배당과 사택 개조비로 6,922달러를 지출하였고, 빌린 융자금으로 250달러를 지불하였으나 아직 빚으로 남은 금액이 4,755달러였으며, 전기 등 비용으로 182달러를 소요했다.

호놀룰루에 있던 다른 민족의 감리교회와 비교할 때 한인감리교회 세례교인이 138명이었는데 246명의 백인교회 다음으로 많았고, 일본인 두 교회의 세례교인을 합친 숫자인 136명보다도 약간 많았다. 학습교인은 85명이었으므로 어느 다른 민족 교회보다도 많았는데 일본인 두 교회의 학습교인을 합친 숫자 57명보다도 월등히 많았다. 그러나 유아세례 교인은 일본인 두 교회가 21명이었는데 한인감리교회는 6명에 그쳤고, 주일학교에서도 두 일본인 교회보다 적었는데 교사와 직원 수가 6명이 적었고, 등록 학생수도 28명이 적었으며, 엡워스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수도 백인교회에 비하면 17명이 적었고, 두 일본인교회보다 53명이 적었다.  

그런데 1917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조석진의 한 해 동안의 노력을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1917년에 모인 하와이 선교연회는 조석진을 권사로 파송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듬해인 1918년에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교회에 파송을 받았는지는 어림잡을 수가 없다. 이듬해 조석진은 하와이섬 파할나로 이동했다.

 

파할나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

 

제13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18년 3월 14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감독 애드나 라이트 레오나르드 목사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조석진은 하와이섬 파할나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해 본 교회에 파송을 받은 자는 담임목사에 한명교 목사였고, 권사에 황선경이었다.

조석진이 파송을 받은 그해 보고된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의 교세는 아래와 같았다. 세례교인이 1명이었으며, 학습교인이 23명이었고, 유아세례교인이 1명이었다. 주일학교가 3곳에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7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이 20명이었다. 1년 동안 교회 건물 유지비용이 12달러였고, 훈련비로 12달러를 지출하였고, 다른 목적으로 24달러를 지불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19년에 보고된 교세를 찾을 수 없어 그의 사역 노력을 비교할 수가 없다.

 

호항 한인교풍회 

 

조석진은 1919년 이후 한인감리교회로 파송 받지 않았으나 여러 면에서 복음 선교와 문화 선교를 이어 나갔다. 호항 교민 지방단 대표였던 조석진은 하와이 한인사회와 종교단체 10여 명과 함께 1923년 11월 25일 오후 2시 30분에 민단 사무실에서 100여 명 남녀 동포가 모인 가운데 ‘호항 한인교풍회’를 조직하였다. ‘호항 한인교풍회’의 목적은 하와이 한인사회에 잡기, 아편, 담배 등의 폐습을 교정하고 금지하는 데 있었다. 취지서 마지막에 ‘호항 한인교풍회의 목적을 성공할 때까지 각각 대표한 단체에서 조직적으로 단합하여 금주 금연을 실시하기로 결심하고, 자에 선포하오니 교풍 실천을 위하여 내력 병진하시는 동포는 우리의 동지요 사회 개량의 혁신가로 인증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호항 한인교풍회 임원으로 회장에 안현경이었고, 총무에 박세환이었으며, 서기에 이지헌이었다. 이날 모였던 각 단체 대표는 기독교회 대표로 김광재이었으며, 미국 북감리교회 하와이 선교연회 대표로 현공춘이었고, 부인구제회 지방회 대표로 김해나였으며, 부인보조회 대표로 손마리아였고, 한인상조회 대표로 전익주였으며, 기독학원 대표로 서기근이었고, 청년회 대표로 이태성이었으며, 신흥학교 대표로 곽래홍이었고, 의사 찬성원으로 양유찬이었다.

조석진은 1930년을 전후하여 호놀룰루에 있는 꽃 농장에서 노동하였다. 1934년 3월 24일 저녁에 호놀룰루 기독교회 목사인 이종관이 다수의 한인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을 초대하여 동 교회 목사실에서 모여 친목회를 가졌다. 좋은 음식을 나누면서 친목하였는데 그날 저녁에 토의한 주요 사건은 청년 대회와 그 사업의 필요였다. 여러 목사가 각각 자신의 의견을 간단하게 발표한 후 강영각이 청년 사업에 대한 계속적인 방침을 설명하였다. 모인 여러분은 그의 청년 사업에 깊은 동정과 찬성의 뜻을 표하였다. 이날 참석한 자는 초대한 이종관, 청년 사업을 설명한 강영각 외에 김이제, 박종수, 임두화, 안창호, 박동환, 민찬호, 안현경, 정인수 그리고 조석진이었다.

하와이 6천 동포 가운데 가장 애국심이 강하다고 불린 이병선이 국민회를 부활하자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돕는 가운데 그해 8월에 그의 사택이 있는 아이아 농장에서 50여 명의 이름있는 인사를 초대하였는데 이 들 중에는 동지회원도 많이 있었다. 음식을 나누며 ‘어찌하면 사회를 붙잡아 민족의 행복을 기도할까’라는 문제를 내놓고, 이정건, 박종수, 안창호, 박동완, 홍한식, 조병요, 강영각, 이태성, 오 운, 최선주, 최창덕, 안원규, 민찬호, 이종관, 홍치범, 김경옥, 정원명, 김윤배 등이 의미심장한 연설을 하였는데 조석진도 그들과 함께 연설하였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위원

 

1935년 1월 3일 오후 7시에 호놀룰루 스쿨 스트릿에 있던 한인기독교회 예배당에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제15회 연회가 개최되었다. 먼저 박동완 목사가 30분간 기도회를 인도한 후 작년 연회 회장이었던 최선주가 승석하여 개회를 선언한 후 각 지역 대표의 대표증을 조사 접수한 후 호항교회 신임 목사 김형식을 회중에 소개하였다. 이어서 연회 임원을 조직하였는데 회장에 김형식, 부회장에 정운서, 서기에 박주범, 순서 위원에 박동완, 규칙 위원에 박동완과 김형식, 재정 위원에 한현경과 이은구, 후보자 전형위원에 양흥엽과 조석진, 통계표 위원에 조석진, 성만찬 위원에 김형식이었다. 위에서 보는 대로 조석진은 후보자 전형위원과 통계표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힐로 한인기독교회 장 붕 목사와 본 교회 대표가 그때까지도 참여하지 못하여서 1월 6일까지 정회하였다가 7일 오후 7시에 재개하고 사무를 처리하였다. 먼저 중앙이사 국장 대리 박동완 목사가 1년 동안 사업 성적을 보고하였으며, 이후 각 교회 담임목사의 보고가 있었다. 교회마다 곤란한 일이 없지 않았지만 좋은 일도 적지 않았다. 호항 한인기독교회는 목사 청빙을 순조롭게 진행하였고, 예배당 건축을 계획하였으며, 힐로 한인기독교회는 경제가 어려운 때에 장 붕 목사와 교우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외국인들이 사랑스러운 도움을 주어 토지 비용 3,000달러를 확보하였다. 마위섬 파이아 한인기독교회는 수년째 담당 목사가 없었지만, 양재구가 부사로 시무한 가운데 여러 교우가 협력하여 교회를 섬기는 중 작년부터 청년들이 열심히 활동하여 청년회와 찬양대가 조직되었고, 주일학교를 잘 발전시켜서 주일 평균 50명가량이 출석하였으며, 작은 교회임에도 재정이 남아 50여 달러가 잔고에 있다고 보고할 때 이 보고를 들은 회원과 방청객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신한민보는 그해 2월 21일에 위의 기독교회 연회를 기사화했다. 1월 7일부터 회장 김형식 목사 주례하에 모여 모든 긴요한 사건을 원만히 처결하였고, 그달 10일에 폐회하였다. 이번 처결한 사건 중에는 김형식, 장 붕 그리고 정운서를 중앙 이사원으로 선정하였고, 헌장을 수정하였으며, 예산을 통과하였고, 교회보를 매월 1차씩 발행하기로 하였으며, 중앙 이사부장으로 박동환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날 참석한 지역 대표는 호항 지역 대표는 조석진을 비롯하여 김형식, 이종관, 안현경, 박주범, 정운서이었고, 힐로 지역 대표는 장 붕이었으며, 마위 지역 대표는 이은구였고, 코나 지역 대표는 김순성이었으며, 와히아와에 지역 대표는 양흥엽과 박동환이었다.

 

동지회와 국민회의 합동

 

김성옥, 최선주, 조병요, 안창호가 동지회와 국민회의 합동을 목적으로 1935년 10월 13일에 호놀룰루에 있던 청찬관에서 모임을 주선했다. 국민회 대표로 황인환, 승용환, 박숭준, 박상하가 모였고, 동지회 대표로는 조석진을 비롯하여 이원순, 김이제가 참석했다. 먼저 오찬을 한 후 와이키키 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최선주의 사회로 조병요가 기도로 담화회를 시작했다. 국민회는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일 단체인 만큼 다시 함께 모여 전시를 잊고 다시 화기롭게 정사를 의논함이 어떠하겠느냐고 의견을 내놓았고, 동지회는 개인적으로 의무와 권리를 이행함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단체로 합동하는 데는 양 단체의 체면을 존중하여 두 이름을 내놓고 합동하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의견을 표했다. 많은 토의를 한 후 모임을 주선한 측에서 작성한 합동에 대한 조건에 대하여 두 단체가 참조하여 합당하면 각각 회원의 찬반을 묻기로 하고 모임을 마쳤다. 

조석진은 1916년 2월부터 1919년 3월까지 3년 동안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로부터 권사와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호놀룰루 제일 한인감리교회와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에서 섬겼고, 하와이 기독교회 위원으로 1935년을 전후하여 여러 해 섬겼다. 

조석진은는 1937년 9월 12일에 호놀룰루에서 향년 65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오아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damien.sohn@gmail.com

05.18.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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