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지금 세계는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패닉(panic)상태에 놓여 있다. 목회와 선교도 마찬가지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이렇게 회중예배가 중단된 적이 있었던가? 앞으로 코로나바이러스를 대적하는 백신이 개발된다 해도 세상은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Post 코로나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 답은 성경과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려운 이때에 우리는 특별히 초대교회 성도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 때의 환경은 지금의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는 그 발발 원인이 아직도 불확실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교회를 향해 뭔가 변혁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 모델이 바로 카타콤이다.
1. 초기 성도들의 안식처가 된 카타콤
카타콤(Catacomb)과 콜로세움(Coliseum)은 초대교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카타콤은 라틴어 단어들 "가운데"(cata)와 "무덤들"(tumbas)이 합성되어 "무덤들 가운데"(among the tombs)라는 의미이다. 이는 로마시대에 기독교인들이 교우를 묻기 위해 만든 지하무덤이었다. 카타콤은 로마의 전형적인 묘이긴 하나 이밖에 나폴리,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파리 등지에서도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 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수평의 벽관들을 파서 시체를 안치한 뒤 벽돌이나 석회로 밀폐했다. 공간이 약간 넓은 곳에서는 장례식도 치렀다. 저들은 이러한 장례식 공간을 예배장소로 이용했다. 로마부근 언덕에만 해도 카타콤은 50여개나 되며 거미줄같이 굴착된 행랑들의 총 거리는 8백72㎞나 된다고 한다. 카타콤의 갱도는 미로와 같이 복잡하기 때문에 로마병사들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음습한 카타콤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죽은 자를 묻기 위해 만들어진 카타콤이 기독교인들의 목숨을 살리는 안식처가 된 것이다.
2. 콜로세움(Colosseum)에서 순교한 성도들
로마의 상징과 같은 콜로세움은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이다. ttps://ko.wikipedia.org/wiki 자료에 의하면 이는 AD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8년 뒤에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 콜로세움은 그 길이는 189m이고 너비는 156m이다. 또한 그 면적은 24,000제곱미터이다. 외벽의 높이는 48m이고, 둘레는 본디 545m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지진들이 일어나며 곳곳에 균열이 갔고 남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현재에는 북쪽 벽만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로마제국의 전성기에는 5만 명에서 8만 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주로 검투사들의 결투가 이루어졌으며, 모의 해전, 동물 사냥, 신화의 재연 등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이토록 아름답고 웅장한 경기장에서 처절한 비극이 벌어졌다. 죄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산체로 짐승의 밥이 되게 한 것이다. 호주 출신의 역사가이자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인 Christopher Kelly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기독교도들의 순교가 유혈이 낭자한 구경거리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77년 리옹에서 한 무리의 기독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중은 기독교도들이 고문대에서 찢기고, 철판 의자에서 그을려지고, 황소 뿔에 받히고, 굶주린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며 갈채를 보냈다. 원형경기장에 질서 있게 앉은 잘 차려입은 군중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도들을 사자에게 던져주는 행위는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로마 다수파의 권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3. 카타콤 교회의 싱앙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가 이루어지는 동안 IXOCE(익투스)라는 암호를 통해 서로 기독교인임을 확인하였다.ΙΧΘΥΣ(IXOCE)는 Ιησους+Χριστος+Θεου+Υιος=Σωτηρ라는 헬라어 첫 글자를 따와서 생겨난 말이다.
Ι+Χ+Θ+Υ+Σ=ΙΧΘΥΣ.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서 "물고기"에 압축되어 들어간 셈이다. 이로서 카타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을 믿는 신앙을 소유했었다.
그 믿음은 저들에게 △함께 떡과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신령한 공동체가 되게 했다. △사망권세까지도 초월하게 했다. △마라나타 재림의 예수를 기다리게 했다. △고난 속에서도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했다.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는 영적인 한 가족이 되게 했다. △행전2:44-46말씀처럼 네 것-내 것을 나누지 않는 실제적 삶을 공유하게 했다. △300년 동안 콜로세움에서 맹수에게 살과 뼈가 뜯기면서도 배교하지 않게 했다. △계급이 없는 진정한 동역자가 되게 했다. △압제 속에서도 누룩처럼 번지게 했다. △마침내는 영원할 것 같은 로마제국을 영적으로 정복하게 했다.
카타콤 교회의 성도들은 생명을 건 생활신앙이었다.
참된 신앙은 고난 속에서 다이아몬드처럼 정제되고 빛이 난다.
선교는 외적인 환경에 굴하지 않고 십자가의 정신을 살아내는 것이다.
4. 카타콤 교회와 현대 교회의 비교
카타콤 시대의 성도들은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소유했다. 여기 그 대표적인 한 사람이 있다. 폴리캅(Polycarp, 69-155)은 요한계시록 2:8-11에 언급된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다. 어느 날 백발의 노인을 형장으로 끌려갔다. 총독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로마황제와 경배하라고 설득했다. 이에 폴리캅은 “그리스도는 8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화형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그 때에 원형경기장 안에는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했던 ‘향기’가 가득했다고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 18).
이에 비해 지금의 기독교회는 어떠한가? 멋진 예배당, 쾌적한 환경, 기름진 음식, 현란한 예배,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 수많은 성경공부와 기도회가 있다. 그러함에도 현대교회에는 왜 초대교회와 같은 신앙이 표출되지 못하고 있는가? 왜 교회가 세상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눈총을 받고 있는가? 그것은 제도권(Christendom)의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보혈이 체휼되지 않은 채 관념적인 종교행위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타콤 성도들처럼 그리스도 앞에서 자아를 뽀개고 주님과 연합된 종말론적인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22말씀처럼 신앙생활이 아니라 삶의 터전에서 생활신앙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맺음 말
“Dum Colosseum stabit(콜로세움이 서 있는 한)/Roma stabit(로마도 서 있고)/dum Roma stabit(로마가 서 있는 한)/mundus stabit(세계도 서 있으리라).” 이 싯귀는 수도사요 신학자인 베다 베네라빌리스(Beda Venerabilis)가 한 말이다. 콜로세움과 함께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 것 같았던 제국 로마는 어디로 갔는가? AD476년에 망하고 없다. 그러나 겨자씨처럼 보이지도 않던 하나님나라는 로마를 뒤엎었고 2천년의 역사의 맥을 따라 도도히 확장되어왔다.
지금 세계인의 1/3이 주님을 믿고 따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카타콤 성도들의 피 맺힌 절규를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저들이 고백했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익투스(ΙΧΘΥΣ)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한 COVID19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홍해를 건너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그리워하듯 코로나 이전의 시대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 그 때는 그 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어리석다. 중요한 것은 미래이며 가나안(본향)을 향해 진취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갈 길은 멀고 험난하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갔듯 우리도 육신의 소욕이나 세상의 풍조보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한 걸음씩 딛고 가야 한다. 그 답은 카타콤 성도들처럼 외적인 환경에 굴하지 않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jrsong007@hanmail.net
11.1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