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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윤리학(5)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바울의 새 관점 (The New Perspective on Paul) (2)

 

“바울의 새로운 관점”의 주장에 의하면, 최초의 칭의(initial justification)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언약적 지위(covenant status)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의 칭의(final justification)는 비록 성령의 능력에 의한 행위이기는 하지만, 부분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 (final justification is partially by works, albeit works produced by the Spirit). 결국 그들은 칭의와 성화를 하나의 칭의 교리 안에 통합시키고 행위 구원을 포함시켰다. 행위로 심판하신다는 라이트의 주장은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와 일맥상통한다. 

전통적인 칭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로마서 3:24; 5:18). 성경적인 칭의 교리는 믿음으로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죄인들에게 전가되어,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도 그 믿음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방편 혹은 도구이기 때문에 공로가 될 수 없다.(faith as an instrument) 성경적인 칭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의 공로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가 그 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새 관점이 주장하는 미래의 칭의 (future justification by works for believers in Jesus Christ), 혹은 유보적 칭의는 칭의의 단회성과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칭의는 단번에 그리고 완전하게 (once for all) 얻는 의이다. 이것은 법적인 개념이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완료분사)”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완료시제).” 성경적인 칭의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칭의이다. 법적이며, 선언적이다.

새 관점이 행위를 칭의의 조건으로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교리적 잘못이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성화를 위하여 순종과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으로 행위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증거이며 칭의의 열매이다.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B. 율법폐기주의 혹은 반율법주의 (Antinomianism)

 

기독교 윤리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법)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에 관해 두 극단적인 입장이 있다. 하나는 율법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폐기주의 혹 반율법주의(Antinomianism) 이다.

율법폐기주의(반율법주의)는 영어로 antinomianism인데, 이것은 헬라어 ἀντί (반대)와 νόμος (법)의 합성어이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율법’은 도덕법 (십계명)을 가리킨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은 ‘율법의 세 번째 역할’과 관련이 있다. 율법의 ‘첫 번째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두 번째 역할’은 사회의 불법을 억제하는 것이다 (to restrain lawlessness in society).

그리고 율법의 ‘세 번째 역할’ (The ‘third use’ of the law) 은 신자의 삶의 규범의 역할이다. 루터는 율법의 제3의 역할을 인정하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칼빈은 율법(도덕율)이 신자들의 삶의 규범이 되어 성화의 방편이 된다고 주장한다. 

청교도 사무엘 볼튼(Samuel Bolton)은 그의 저서 <기독교 자유의 참된 경계> (The True Bounds of Christian Freedom)에서, “율법은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복음으로 보낸다 (칭의). 복음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정하기 위해 우리를 율법으로 보냅니다(성화)” (“The law sends us to the gospel for our justification; the gospel sends us to the law to frame our way of life”) 라고 했다. 볼톤은 율법의 역할에 대하여 매우 잘 정리하였다.

그러나 율법폐기론자들은 도덕법 (십계명)은 성도들의 삶의 규범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율법 폐기론자들은 다음의 성경 구절을 근거로해서 신자들은 율법 (도덕율)과 관계 없음을 주장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17); “너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느니라”(롬 6:14);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이들은 이 성경 구절들을 잘못 이해하였다. 

그리고 새 언약 신학 New Covenant Theology) 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신자들은 “신약의 그리스도인”이며, “율법과의 관계는 끝났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신약성경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 언약 신학파들은 신구약 성경의 연속성 (continuity)을 부인하는 잘못을 범했다. 

존 머리 (John Murray)는 “율법 폐기주의는 도덕법의 영속적인 권위와 신성함을 부인함으로써, 우리의 거룩한 신앙의 중심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주님 자신의 진실성과 권위에 대한 타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지금부터 율법폐기주의자들이 잘못 해석한 성경구절들을 비판하겠다.

 

(예레미야 31:31-34의 새 언약)

렘 31:33,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 예레미야가 언급한 “내 법”은 무슨 법인가? 도덕법 (십계명)인가? 아니면 다른 법인가?

이 본문은 “새 언약 신학” (New Covenant Theology)에서 많이 언급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모세의 율법보다 더 높고 더 영적인 새 법이 나왔다. 이것은 바울이 고전 9:21과 갈 6:2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법”(the law of Christ)이다. 예레미야 31장에서 말하는 “마음에 새긴 법”은 모세의 율법과 같지 않다.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의 법은 마음에 기록된 법이다. 결과적으로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은 새 언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규범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옛 언약의 시대에 속했기 때문에 새 언약 시대에는 적용되지 아니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리처드 바르셀로스 (Richard C Barcellos)는 그의 책 <십계명을 변증함: 새 언약 신학을 비판함> (In Defense of the Decalogue: A Critique of New Covenant Theology)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 언약 아래의 율법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하나님은 율법 자체를 만드신 분이시며, 또한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시는 분이시다.” 바르셀로스의 결론은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 언약의 법은 예레미야서를 기록할 당시 이미 기록된 율법 (십계명)을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새 언약 아래의 법은 하나님께서 돌 위에 새기신 율법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새기실 율법임을 말한다. 즉, 모두 동일한 율법 (도덕율)이다. 율법이 처음에는 돌판에 기록되었으나, 성령의 역사로 돌판에 새겨진 그 율법을 마음판에 새기는 것이다.”

십계명은 신 구약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같은 삶의 규범이다. 당연히 십계명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삶의 규범이 된다. 딤전 1:8,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그리고 딤전 1:9-10은 십계명을 확장하여 적용하고 있다. 도덕법 (십계명)은 제한된 역사적 시기의 일부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모든 인류를 위한 기본적인 규범이 되는 법이다. (Patrick Fairbairn, 1&2 Timothy and Titus, Geneva Commentaries)

 

(마태복음 5장: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심)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전체를 말한다. 이 구절을 근거로 율법폐기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입장은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율법이 무효라고 선언하셨다고 주장한다.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과 관계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율법을 다 성취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미 오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일은 과거의 일이며, 십계명과 신약의 성도들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율법폐기주의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뜻을 잘못 해석한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율법을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으로 구분한다. 

의식법은 이스라엘의 예배 (제사)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구약의 의식법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의식법이 다 성취되었다. 우리가 지킬 필요가 없다. 

시민법은 신정정치로서 이스라엘에 주어졌다. 그러나 신약에는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모든 민족으로 확장되어,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인종과 민족의 차별이 없이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 임한다. 

더 이상 신정국가가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시민법은 그 정신적인 원리는 적용될 수 있지만 시민법 자체는 적용되지 아니한다. 

도덕법(십계명)은 모든 시대를 위해 제정되었다. ‘우리의 삶과 행위에 대한 규범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의 요약이다. 

하나님의 법과 그리스도의 법 사이에는 구별은 없다. 이 둘은 동일한 것이다. 이 법은 불변하고 영존한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은 다가올 시대까지 권위가 변함없이 계속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영원한 삶의 규범이 된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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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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