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경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에 관한 글들
II. 칼빈의 영적인 순례
6. 최초의 제네바 체류
칼빈은 자신이 탁월하다는 평가와 명성을 얻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그 책자를 펴낸 직후 바젤을 떠났다. 심지어 바젤에 있을 때에도 그가 그 책을 썼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는 그 일을 계속 비밀에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차에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이 칼빈을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파렐은 점잖은 충고와 강요가 아니라 마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손을 뻗어 자신을 붙잡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협박을 가하면서 제네바에 머무르도록 했다고 한다.
칼빈이 은거하고 싶었던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적들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칼빈은 제네바를 경유하며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계획을 세웠다. 제네바에서는 하룻저녁만 지낼 생각이었다. 파렐과 피에르 비레(Peierre Vireet)는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제네바로부터 교황주의자들을 몰아내었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불안했고 악하고 위험한 파당들이 시를 분열시켜 놓았다. 제네바에 체류하고 있을 때, 비열하게도 배반하여 교황청으로 돌아선 어떤 사람이 칼빈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신분을 알렸다.
이때에 복음을 확장시키려는 놀라운 열정으로 불붙고 있던 파렐이 갑자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칼빈을 붙잡았다. 칼빈이 조용히 숨어서 연구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파렐은 아무리 간청을 해도 칼빈이 들어주지 않자 마침내는 저주를 퍼부었다. 파렐은 칼빈이 한가로이 자신의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그와 같은 비상시국에 도움을 주기를 거부한다면 칼빈을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이에 칼빈은 크게 압도당하여 여행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이 수줍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어떤 특별한 직책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었다고 고백한다.
그 일이 있은 뒤 4개월이 되기 전에 재세례파들이 제네바를 방문하였고 칼빈은 완전히 공개된 토론을 전개하는 것이 큰 위험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면서, 이른 바 200인 회의 석상에서 16일부터 19일까지 4일에 걸쳐 그들과 논쟁을 벌였다. 18일과 19일까지 계속된 토론 후에 이 회의는 재세례주의자들을 반박하는 표결을 하여 도시를 떠나도록 명령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몇 명의 저명한 인사들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칼빈과 그의 동료들에게 큰 환난을 안겨 준 어느 사악한 배교자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두 차례 신교로 개종했다가 마침내는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간 파리출신 학자 Pierre Caroli가 이 당시 근처의 로잔(Lausanne)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Caroli의 공격 대상이 되어 있던 Viret을 옹호하기 위하여 칼빈이 로잔에 가자, Caroli는 칼빈을 항하여 칼빈의 첫 번째 교리문답(1537-1538)에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없다는 점과 소위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사용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칼빈을 아리안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오랫동안 계속된 토론을 거쳐 칼빈은 아리안주의자라는 혐의를 벗었다. 물론 칼빈이 아리안주의자라는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난동들이 발생하여 칼빈과 동료들을 괴롭혔다. 이 같은 급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칼빈은 자신이 겁 많고 유약하고 소심함을 알면서도 처음부터 이런 격랑들을 견디어 내야했으며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후, 몇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자, 그 자신은 기뻐하며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7. 스트라스부르그 체류
이런 방법으로 해방된 칼빈은 어떤 공적인 책임도 맡지 않고 조용히 지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로부터 축출되었지만, 탁월한 그리스도의 종 마틴 부처(Martin Bucher)가 파렐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저주를 사용하면서 자신에게 또 다른 직위를 떠맡겼다. 부쳐는 칼빈을 향하여 “많은 재능들을 부여받고도 요나와 같이 제공된 사역을 맡지 않으려 한다면 선한 양심의 소유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라는 내용으로 1538년 1월 경 바젤에 있는 칼빈에게 서한을 보냈었다. 부처가 칼빈을 요나에 비유하면서 위협하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칼빈 자신은 강의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칼빈은 언제나 큰 모임에 얼굴을 나타내거나 참여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는데도 그도 모르게 제국의회에 끌려 나가 좋든 싫든 대중들 앞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주님은 이 도시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도시를 사로잡고 있던 위험한 격정과 난관들을 진정시켜 주셨고 놀라운 능력을 통해 훼방자들의 잔인무도한 시도와 사악한 책략을 분쇄하였다. 그때 칼빈은 자신의 희망과는 반대로 자신이 처음 맡았던 직책을 다시 맡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의 목사 베드나르다(Jacgues Bernard)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양심상 나는 현재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심의 소리 때문에 스트라스부르그를 쉽게 떠나지 못하겠다. 양심은 타당하고 거룩한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영의 증거이며 세상에 대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증거이다. 나의 사역이 나에게 불행하고 불운한 것처럼 보였던 재난의 시간, 제네바 추방 이후 나는 주님께서 직접 나에게 분명한 음성으로 부르시지 않는 한, 즉, 주님께서 내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도록 어떤 필요를 제시해 주시지 않는 한, 내가 먼저 교회의 어떤 지위를 떠맡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완강히 그 같은 결심을 고수하자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자들은 나를 이길 때까지 나에게 다양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격이 별다른 진전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난 뒤부터 마침내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요나의 경우와도 같이 내가 하나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파수군의 직분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의 양심 속에서는 이 교회의 안녕이 항상 염려의 대상이었다. 그 교회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버리려는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워낙 소심했던 자신은 온갖 핑계를 둘러대면서 그 같은 무거운 짐을 직접 떠맡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침내 의무감에 사로잡힌 칼빈 자신은 그가 이별을 고하고 떠나왔던 그 양떼들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칼빈은 마침내 1541년 9월 13일 스트라스부르그로부터 제네바로 돌아왔다. 베자(Beza)는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온 해인 1542년에 환난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고 서술한다. 자신이 양떼들을 맡게 되었을 때 눈물과 큰 걱정과 좌절 그리고 슬픔이 그를 엄습했다. 이 일에 대해 칼빈 자신은 주님이 그의 증인이라고 고백한다. 그가 이 난관을 극복해주기를 고대하던 몇몇 선한 사람들이 또한 그의 증인인 것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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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