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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뒤에서 신음하는 내면

김한맥 선교사 (문화동원연구소 대표)
김한맥 선교사

(문화동원연구소 대표)

오늘 뉴스를 보면서 나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인기가수의 숨겨진 진실이 소개되었는데 참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내용의 진위여부는 언제가 가려지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아픔 혹은 고통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는 대중 앞에서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웃음 뒤에 있는 그 내면은 얼마나 아파하며 통곡하고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세상이 너무도 가혹하게 느껴졌다. 뛰고 있는 나의 맥박이 먹먹해졌다. 이 세상을 어이할꼬? 신경도 세포도 없는 마음이 감당하기 어렵도록 아파왔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또는 드러난 이후에도 당사자들이 겪는 고통과 깊게 패인 상처는 쉽게 아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생을 고(苦)라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죄된 인간들 사이에서는 언제고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에 누구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점이 무서워진다.

한민족의 역사에는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다툼들이 많았다. 당장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남북의 대척은 역사가 아닌 현실이기도 하다. 고구려가 망한 원인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 벌인 쟁투에서 찾을 수 있다.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면 남편도 자식도 다 장애물로 여겨지는가 보다. 형제는 말할 것도 없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시기(猜忌)에 연유한다.

조조의 아들 조식이 남긴 시를 한 번 살펴보자. 그의 형인 조비가 동생을 시기하며 죽일 꾀를 꾸며 형제라는 제목의 시를 짓되 형제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게 지으라 했다. 그때 조식은 “콩대를 태워 콩을 삶네. 콩이 솥 안에서 흐느끼니 같은 뿌리에서 자란 것끼리 끓고 끓임은 어인 일인가?”라며 한탄했다. 인간의 잔혹함을 이보다 더 적절히 표현한 말이 있을까?

세상이 점점 더 무섭게 변하고 있다. 바로 무심(無心)이다. 무심은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감정이 말라있다는 의미다. 그러니 노래를 불러도 춤을 추지 않게 된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아프게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절제하라고 주신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런 감정들을 통해서 사람끼리의 진정한 교감을 원하신 것이라 여겨진다. 나이가 들어 가장 후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친구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왜 친구가 없을까? 내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방적일 수 있지만 우정은 일방적일 수 없는 까닭이다.

세상의 메마름은 곧 나의 메마름이다. 이를 되뇌면서 아주 작은 희망을 보았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반복하여 나오는 TV광고에 유니세프, 레스큐, 국경없는 의사회와 환경단체 등에서 도움, 지원을 구하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서다. 그런 단체들이 아무리 비영리단체라 해도 광고를 하기 위해서는 광고료를 지불해야 될 것이다. 만약 아무리 광고를 하고 도움을 요청해도 그에 반응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런 광고들은 끊어지거나 중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광고들이 몇 년째(내가 알기로) 이어지고 있다. 광고를 보는 누군가가 호응하고 있다는 증거다. 

호응의 정도가 얼마나 충분한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광고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가 다 무심하지는 않다는 최소한은 희망이다. 가랑비에도 몸이 젖을 수 있다면 그런 요청에 호응하는 최소한의 누군가들이 어둠을 밝히는 불을 켜게 되고 그렇게 켜진 불은 어둠보다 더 환하게 세상을 비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경을 이긴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곤경 혹은 절망의 상황에서 누군가 한 사람의 지지나 격려가 역경을 극복할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에게는 절대적 내 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그 내 편은 배우자나 부모일 수도, 형제나 자매 또는 친구일 수도 있다. 그렇게 존재하는 그 내 편이 웃음 뒤에서 슬퍼하는 내면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혹 내게는 그런 내 편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시라. 더 절대적인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5,16). 

점점 더 무심해지는 세상에서 웃음 뒤에 슬픔을 숨기고 아파하는 그 내면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자. 오직 그분만이 세상의 희망이며 치료자가 되심을 알자. 힘써 알자!  

hanmackim@hanmail.net    

 

09.1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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