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기쁠 때 노래하고, 슬플 때 울고, 즐거울 때 웃으며 괴로울 때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 ‘감정’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만일 사람에게 희로애락의 검정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들은 감정을 잃어가고 있다. 전자 로봇 인간과 AI 같은 무감각하고 냉혈한 현대인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나는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사람들은 마음에 느끼는 감정을 얼굴로 표현하고 몸으로도 표현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언어로 자기의 생각이나 뜻을 나타내지만 가장 자연스럽고 손쉬운 표현의 방법은 역시 ‘노래와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기 전에 노래부터 배우며 노래로서 마음에 느끼는 감정을 나타낸다. 그런 의미에서 노래와 춤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원초적인 행동이며 원시적인 의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기쁘고 즐거울 때 노래하고 춤을 추지만 슬플 때나 괴로울 때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기쁜 노래도 있고, 슬픈 노래도 있다. 괴로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래도 있고, 단합을 과시하거나 용기를 북돋우는 노래가 있고, 승리의 노래도 있다.
가을은 노래를 부르고 싶은 계절이다.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들길을 지나며, 낙엽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산길을 걸으며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쁘거나 슬프거나,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편안하거나 불안하거나 사람에게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노래가 있어야 한다. 자기 혼자만이 부르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 가을에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를까?
마음이 기쁠 때 감사의 노래를 부르자. 출애굽에서 탈출하여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구원의 기쁜 노래를 불렀다. 오늘 우리도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자. 이 기쁨의 노래는 즐거움의 노래가 될 것이며, 그 노래가 바로 찬송이 될 것이다.
마음이 슬퍼질 때 위로의 노래를 부르자. 아무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슬픈 일이나 괴로울 때가 없으란 법이 없다. 우리가 세상 살기가 힘들고 슬프고 괴롭다고 한숨만 쉬고 울고 있을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불러야 한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옥에 갇혔으나, 그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슬플 때 부르는 노래는 자신에게 위로가 되고 또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는 무한한 위로가 된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 때 노래를 부르자.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부르는 노래는 ‘승리의 노래’가 된다. 환난과 핍박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요, 이 고통을 다른 힘으로도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러나 환난 때에 노래를 부르면 이 노래가 승리의 찬가로 바뀌고 용기를 북돋우어 승리하게 될 것이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르며 못이 거꾸로 박힌 판 위를 맨발로 걸어가도록 강요된 적이 있었다. 이때 주 목사는 노래를 불렀다. 주 목사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참으며 끝까지 걸어갔다.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주 목사의 발바닥에서 피가 솟구쳐 나오는데도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걸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 맘 붙드사 그곳에 있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찬송가 491장). 나는 생각한다. 아마 주기철 목사가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면 끝까지 걷지 못하고 도중에 쓰러졌을 것이라고…..
노래는 고통을 극복하고 천국의 기쁨을 소유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이 가을에 우리 함께 노래를 부르자!!
sjkcdc@hanmail.net
10.19.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