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그리스도인이 찬송을 멈추지 못하는 까닭은

복음은 마음을 기쁘게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기쁨에 뛰어오르게 만든다

매주 금요일이면 나는 내가 사는 아랍에미리트 언덕 아래 모스크를 향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기도를 낭송하고, 의식을 거행하고, 쿠란 메시지를 듣는다. 그런데 그들이 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그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모스크에는 회중 찬양이 없다. 그들의 예배에는 노래가 포함되지 않는다. 회중 찬송가도, 악기도 없다. 동양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축제 찬송을 부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종교 활동에서 회중 노래는 없다. W. M. 클로우가 말했듯이, “불교 사원에서는 결코 찬양의 함성이 울려나오지 않는다. 무슬림 신도들은 결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 거기에는 결코 용서받은 자가 부르는 환희의 노래가 없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도무지 찬양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하 묘지, 성당,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모든 곳에서 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어느 지하 교회는 벽과 창문을 방음하고, 때로는 매트리스까지 깔아서 발각되지 않고 찬양 목소리를 높이도록 조치했다. 예수님은 기뻐하는 무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이 무리가 잠잠하면 돌까지도 소리칠 것이니라”(눅 19:40).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는 찬양을 막을 수 없는 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출애굽 이후에 그의 백성은 홍해 옆에서 노래하며 기뻐했다(출 15:1-2). 여러 세기가 지나고 이사야는 새로운 출애굽, 즉 언젠가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전 세계적인 구원을 기대했다. 그가 기다렸던 약속된 구원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에 의해 성취되었다(요 1:29).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불러야 할 새로운 노래가 있다(사 42:10).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가슴으로 “노래하고 찬송함으로” 응답한다(엡 5:19).

수많은 종교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종교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내가 뭔가 하는(Do) 종교와 이미 성취된(Done) 종교이다. 전자는 축제와 제사, 의식을 규정하고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수용을 얻으려고 하거나 거기에 일정 부분이라도 기여하려고 한다. 그러나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수용이라는 목적이 “한 번에”(히 7:27; 9:12; 10:10) 완성된다. 더 이상 덧붙일 게 없다.

이슬람에는 오대 기둥이 있고, 불교에는 팔정도가 있다. 시크교는 자기 구원의 패턴을 규정하고, 뉴에이지는 영적 기술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예배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는 없다”(9:9). 구원이 성취되었다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무서운 의무와 “심판에 대한 두려운 기대”(10:27)만 있을 뿐이다. 그들의 예배에서 환희에 가득한 찬양을 찾아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2. 형제자매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주일 아침 찬양하는 우리는 단지 청중이 아니다. 청중은 하나님이다. 찬양하는 동시에 우리는 서로를 가르친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로 서로 화답하는 것”(엡 5:19)을 포함한다. 회중 찬양은 수직적일 뿐만 아니라 수평적이기도 하다. 

교회는 앞에서 인도하는 공연자를 지켜보는 수동적인 오락이 아니다. 교회는 적극적인 공동체 운동이다. 18세기 찬송가를 부르건 현대 찬양을 부르건, 우리는 성경이 드러내는 진리 안에서 함께 기뻐한다. 우리는 강단에서 선포된 복음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신앙고백이나 교회의 신앙 선언문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든 찬양에서 성경 진리를 확언한다. 모든 신자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롬 8:9).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서로에게 영적 유익을 제공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장소이다. 조나단 리먼은 이것을 “반향”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찬양은 온 사람, 즉 마음, 정신, 애정, 의지를 사로잡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되뇌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이다.” 찬양은 “교회 문 밖으로 울려 퍼져야” 하고 이웃과 가정으로까지 퍼져야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찬양 선택은 중요한 목회적 책임의 하나이다. 찬양은 가르침을 포함한다. 찬양할 때 교회는 단순한 감정주의가 아닌 신학적 무게감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목소리를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부활하신 구세주에 대한 영원한 진리를 고양시킨다. 

 

3. 종말이 가깝기 때문이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매질을 당했다. 그런데도 누가는 그 두 사람이 자정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송가를 불렀다”라고 말한다(행 16:25). 고통, 굴욕, 위협조차도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찬양은 막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이 고통을 겪을 때, 애도와 탄식이 터지는 건 이상하지 않다. 다양한 시편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승리주의가 이르다는 사실이다. 이 땅은 진부한 행복을 위한 곳이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기뻐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모든 시대에 걸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진심으로 찬양했다. 크리스토퍼 애시가 말했듯이, “우리는 현재가 즐겁기 때문에 찬양하는 게 아니다. 미래가 영광스럽기 때문에 찬양한다.”

찬양은 우리의 감정을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지닌 순수한 위대함과 일치시킨다. 매 주일 우리는 궁극적 가치를 지닌 복음으로 나 자신을 재프로그램한다. 진리를 듣고 찬양으로 응답한다. 우리는 모든 족속, 언어, 민족의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에게 새 노래를 부른다. 언젠가 우리는 그와 함께 통치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찬양한다(계 5:9-10). 그리고 우리가 찬양할 때, 온 세상은 빌립보 옥에 있던 다른 죄수들처럼 귀를 기울인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한 사람이(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우리 교회가 두바이에서 얼마나 열렬히 찬양하는지에 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우리 교회에 나오는 흑인과 백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동양인과 서양인 등 예배자들의 다양성에도 감명을 받았지만, 특히 찬양의 크기와 기쁨에 감명을 받았다. 우리의 찬양은 말 그대로 그의 팔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그들이 찬양하는 내용을 믿지 않았지만, 그들은 정말로 믿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개종하여 우리 교회에 합류했다. 할렐루야!

 

가장 큰 목소리로 

 

나는 한때 캐나다 트리오 러시의 로큰롤 앨범을 가지고 있었다. 앨범 뒷면에는 “최상의 결과를 얻으려면 볼륨을 최대로 높이라”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5장의 새 노래가 요구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구원자를 향해서 열광적으로 찬양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떤 특정 악기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누구라도 기타 볼륨은 높일 수 있다. 이교도 세계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보다 더 잘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한껏 고조된 인간의 목소리이다. 찬양과 즐거운 노래로 기뻐하는 우리의 목소리이다. 

복음을 증언하다 죽임을 당하고 기둥에 묶여서 시신이 다 태워진 윌리엄 틴데일은 이렇게 말했다. “복음은 좋고 즐겁고 기쁘고 또 즐거운 소식을 의미한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노래하고 춤추고 기쁨에 뛰어오르게 만든다.” 예수님에 대한 이 좋은 소식, 이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영원히 찬양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다.

by John Folmar, TGC

10.0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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