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읽을 시간이 없다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언어의 능력이 충만하길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곳곳에서 들리는 반가운 소식은 그리스도인들이 우후죽순 모여 독서모임을 만들고 책을 읽는 것이 트렌드가 되었다는 것이다. 총체적 선교, 통합과 투쟁의 한국 교회의 풍경, 그 거창한 큰 흐름 속 미세한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진리에 목말라 평균 두세 개의 독서모임에서 함께 책을 읽고 있는 청년들과 학자들을 만난다. 오늘날 책에 대한 기독교 문화의 주류는 사상이다. 사상이란 ‘구체적인 사고나 생각’ 또는 ‘판단과 추리를 거친 의식적 내용 또는 논리적 타당성을 갖춘 통일된 판단 체계’를 말한다. 나는 기독교가 믿는 사상, 즉 성경적, 신학적, 교리적 관점을 설명하는 책 아닌 다른 장르의 책을 읽는 모임을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시를 만들고 읽는 기독교 모임은 간혹 있지만, 특히 소설을 읽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마치 필요한 단백질을 공급받기 위해 닭가슴살만 먹는 다이어터들처럼, 가던 길로만 다니며 새로운 공간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 사람처럼, 또는 마음에 드는 성경 구절만 묵상하며 새로운 삶으로의 확장을 거부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우연히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마주하고 응시한 멋진 그림 한 점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부주의를 정상처럼 여겼는지’ 깨닫게 해 주듯이, 좋은 소설 한 편은 기존의 나를 넘어서는 인간의 경험을 보게 한다.  

1. 메시지와 삶의 연결

 

밀레니엄 세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느끼는 갈급함은, 절대적 빈곤과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로의 한계다. 아예 인지할 수 없다면 모를까, 그 모든 것을 경험한 세대와 함께 자라고 그들의 삶을 보고 자랐다는 것이 문제다. 예를 들면, 어릴 적 당시 이십 대를 살고 있는 청년어른들은 ‘산기도’의 영성으로 다져진 세대였다. 산속 좋은 기도 자리를 찾는 경쟁도 매우 치열했고, 나무 하나를 잡고 밤을 새워 부르짖던 모습과 소리가 아련히 기억난다. 나의 세대 젊은 목사들과 리더들은 산 기도를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런 태생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넓혀주는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였다. 특히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5년 주기로 꺼내 보는 최고의 소설이다. 현대의 고도로 발전된 도시가 주는 문화의 편리한 구조 속에 다른 상상을 하지 못하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 되어 있다면 주기적으로 읽기를 추천한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며 동시에 세상이 쫓는 가치를 따라 사는 ‘세련된 신앙인’이 되겠다는 사람들, 믿음의 고백으로 천국행 승차권을 예약해 놓은 채 현재 삶 속 인기와 화려함과 명예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사람들, 그래서 불신자로 하여금 성공의 본을 보여 그들을 복음의 길로 인도하겠다는 합리적 사람들에게 특히 추천한다. 환난의 시대 종교적 전쟁을 겪으며, 장애를 가진 딸아이 때문에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옥에 오랫동안 수감되었던 번연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어떤 길인지, 자세히 반복해서 체험해보기 바란다. 그가 보여주는 진리의 메시지가 그의 비유형식의 글을 통해 당신의 삶을 파고들 테니 말이다. 그의 소설은 그의 실제 삶을 허구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풀어 당신의 삶과 연결해 줄 것이다. 

 

2. 내면의 성찰과 씨름을 통한 성장

 

소설은 인간의 삶과 감정과 경험에 관한 것을 다룬다. 기독교 사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서는 불행히도 이러한 경험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는, 현실을 최소한으로 줄여 놓고 버티면서 많은 종교적 행위와 공상으로 풍선처럼 부풀려 채운 다음 그것에 “기독교적”이라는 태그를 붙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잊고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다. 중세 수도원 시절부터 오늘까지 ‘기독교적 삶’의 정의에 대한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유일하게 일치하는 진리는 ‘고독, 침묵, 금식’이 내면의 영성에 기초가 된다는 사실이다. 즉, 덜 바쁘고 덜 분주할수록 기독교적으로 살 수 있는 범위가 커진다는 뜻이다. 

좋은 소설의 특징은 힘겨운 내면의 성찰로 초대한다는 것에 있다. 본성이 죄로 가득 찬 우리의 내면세계를 보게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 내면의 진리의 성찰을 도와줄 소설가와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3. 더 깊은 말씀의 묵상 속으로 

 

왜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파헤치는 것에 열정적이지 않을까? 많은 복합적 이유가 있겠지만 더 쉽게 더 많이 성경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교회에서 했던 교육과 노력 들이, 성경을 하나의 신비한 절대 경전으로, 어렵고 파헤쳐야 하는 비밀 지도로 인식하도록 인도한 것만 같았다. 

사실 그 어떤 재미있는 소설보다 성경이 더 문학적이다. 성경은 재미있고 매력적이며 아름다운 문체들로 가득하다. 예수님은 소설의 형식과 같이 허구의 비유형식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고, 예언자들은 판타지 요소가 가득한 언어로 진리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만약 성경을 이미 많이 읽었고, 읽을수록 재미가 없어지고, 다 아는 내용 같고, 매너리즘에 빠졌다면, 성경의 문학적 요소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을 확률이 크다. (물론 이에도 성령님의 조명하심과 도우심이 가장 중요하다) 영웅의 이야기, 비극, 서사시, 비유, 상징, 이미지, 속담, 사랑에 관한 시, 찬송가, 예언시, 풍자, 행위예술 등을 담고 있는 성경 66권은 그 자체로 문학예술이다. 분별력을 갖춰 종교성에 속고 살고 싶지 않다면 예언자와 친해져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지만 차오르는 분노와 설움이 한계에 다다라 쏟아 놓을 곳이 필요할 때는 다윗의 시들을 옆에 두어야 한다. 단순하고 명확한 결단이 필요하다면 솔로몬의 잠언을 새기고, 갈 곳 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갈급하다면 사도 바울의 글들과 동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짧은 생애 동안 읽어야 할 중요한 너무 많은 신앙 저서가 많기 때문에 문학 작품은 성경에서만 읽고 즐겨야 할까? 한정된 여가시간 동안 성경을 읽을 시간도 부족하다면 굳이 소설읽기라는 여가시간이 필요할까? 아니면 기독교 관점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시나 문학작품만을 가끔 외식하듯 읽어야 할까? 많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고 온 세상이 주목하는 소설이나 문학 작품에 눈과 귀를 닫는 것이 기독교적인 태도일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온 세상을 웃게 하고 울린 소설에는 보편적 진리와 은총이 존재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최근의 개인적 체험은, 소설을 통해 상상력이 키워진 청년들이 성경을 다시 재미있게 파헤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귀한 만큼 소설을 선정함에 있어 지혜로워야 한다. 한 가지 제안은 저명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문학자인 사람들의 추천작을 먼저 시도해보는 것이다. C. S. 루이스나 유진 피터슨, 그리고 문학 신학자 리랜드 라이켄의 추천작 중 선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분주함과 속에서 정신이 없다고 느낄 때 소설을 펼쳐 보기를 바란다. 그 잠깐의 여행은 또 다른 진리를 선물할 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때에도 좋은 소설을 펼쳐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의 고단함이 주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대서사 속 한 에피소드일 뿐임을 경험하게 해 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모든 시간적 우선순위를 드리고 헌신하기를 결단한 열정의 리더도 때로 좋은 소설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독교 문화 속 하나님의 거룩한 언어의 능력이 충만하게 임하길 소망하며, 

Soli Deo Gloria!

by 서나영, TGC

10.0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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