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냐 할머니의 장례식 저의 교회에 꾸준히 예배드리는 고려인의 할머님들 가운데, 지난 봄에 80세 되시는 최따찌야나의 장례를 집례했습니다. 지금까지 장례를 치른 가운데 아마 가장 많은 조문객들이 슬퍼했던 것 같습니다. 따찌야나 할머니의 큰 손인 탓도 있었지만, 40년 넘게 오뎃사에서 사시는 동안 많은 이웃들과 정을 나누셨기 때문입니다. 구소련이 무너진 후 이주해 온 대부분의 고려인들과는 달리, 교회 할머니들께서는 1960년대에 중앙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주해 오신 분입니다. 이런 고려인들은 아주 소수인데 당시에 지식인들이거나, 농사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특별히 오신 분들입니다. 지식인들은 군 장교, 연구원, 교사들이고, 농사로 오신 분들은 우크라이나에 처음 양파를 보급하러 오셨습니다. 오뎃사할렐루야교회는 이런 분들이 주축이 되셔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고려인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933년생이신 최따찌야나는 중앙아시아가 아닌 극동지역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가 1937년 10월이어서 따찌야나 할머니가 강제이주 기차를 탄 때는 4세 된 어린 아이였지요. 당시 화물칸 기차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계셨답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청년기를 보내시고 결혼하신 후, 가장 서쪽 오뎃사까지 이주하셔서 양파 농사와 시장에서 마르꼽 장사를 하시면서 열심히 사셨습니다. 말없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따찌야나의 죽음은 고려인의 한 시대를 대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절대 복종해야 하는 이방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몸부림쳤던 고려인의 기구했던 삶이 역사 속으로 아무런 말없이 그냥 묻혀가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땅에 무엇을 남겼는지, 또 이 땅에 남은 자녀들에게는 무엇을 남겨 주었 지 생각하면 왠지 답답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한국어를 생소한 외국어로 여기는 고려인 청년들은 자신을 우크라이나 사람으로 여기며 살면서도 또 한편으로 이방인 대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표정은 더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조국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크라이나 끝자락까지 찾아오신 오뎃사의 고려인들…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또 다른 땅으로 농사짓기 위해 찾아 나서는 고려인들을 보면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이 그지없이 밀려옵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마지막 종착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고려인이 세운 오뎃사할렐루야교회는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에게 민족적, 영적인 등대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이유입니다. 삶의 터전 없이 구소련 전역을 다니며 농사짓는 고려인들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터전을 안겨주어야 하는 할렐루야교회의 사명을 생각하면, 지금 서있는 자리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오뎃사할렐루야교회가 고려인들에게 예수의 빛을 비추는 등대가 될 수 있도록 기도바랍니다. 정한규 선교사 드림 ▲이메일: visionukrain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