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음)이라 했던가? 완연한 봄기운에 꽃도 피고 버들도 푸르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은 잔뜩 움츠려 있다. 화사한 꽃과 한 폭의 그림 같은 하늘을 보아도 느낌이 없다. ‘춘래불사춘’ 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가슴에 와 닿은 적이 없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죽음의 그늘이 온 세계에 드리워져있는데 인간이 어찌 봄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오늘 4월 14일 자로 Covid19 확진자가 215개 나라에 200만 명이나 된다. 사망자는 12만 명을 넘었다. 집에 갇힌 사람들은 아우성이다. 이럴 때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 현실을 비관만 하지 말고 슬기를 발휘해야 한다. 축구 경기에는 하프타임이 있다. 음악에도 곳곳에 쉼표가 있다. 그것은 무용한 것이 아니라 리듬을 타기 위해 꼭 필요하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잠시 멈추어 서서 삶을 성찰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점검 한다면 이 기간은 너무나 소중할 수밖에 없다.

 

1. T.S. 엘리엇이 말한 잔인한 4월(April is the cruelest month),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겨울은 따뜻했었다/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 4월만 되면 회자되는 시귀가 있다.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의 장편 시 ‘황무지(The Waste Land)’의 첫 구절이다. 시의 화자는 왜 소생의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부르고 있을까? 그는 20세기에 들어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고 생명력을 가진 것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서구인들의 정신세계를 묘사했다. 그 의도는 삶의 방향과 의욕을 잃은 채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사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엘리엇의 개인적 상실감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문명이 겪은 상실감과 결부해 확장된 문학작품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황무지”란 시가 우리 한인들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제주 4·3사건, 4·19혁명, 4·16 세월호 참사 등 유독 이 사월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4월은 피 맺힌 달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우리 구주 되신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금년은 Covid19의 공격까지 겹치니 어찌 잔인한 달이라 아니할 수 있을까?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아니하다. 
스포츠에는 작전 타임, 음악에는 쉼표가 있다. 
인류는 Covid19로 인한 멈춤을 한탄하기보다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2. 무스타파 달렙 혹은 무명의 “코로나에 흔들리는 인류” 글 요약

 

아무것도 아닌 “코로나바이러스”라 불리우는 작은 미생물이 지구를 뒤집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새로운 의문을 던지고 이미 안착된 규칙들을 다시 재배치한다. 다르게. 새롭게. 서방의 강국들이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 얻어내지 못한 휴전. 전투중지 것들을 이 조그만 미생물은 해내었다. 알제리 군대가 못 막아내던 리프지역 시위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기업들이 못해내던 세금 낮추기 혹은 면제, 무이자, 투자기금 끌어오기, 전략적 원료가격 낮추기 등도 해냈다. 시위대와 조합들이 못 얻어낸 유류가격 낮추기, 사회보장강화 등도 이 작은 미생물이 성취해 내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매연, 공기오염이 줄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갑자기 생겨 뭘 할지 당황스럽다. 부모와 아이들은 집에서 함께 하며 서로 알아가기 시작했다. 일은 이제 더 이상 삶에서 우선이 아니며 여행, 여가도 성공한 삶의 척도가 아님을 깨닫고 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약함'과 '연대성'이란 단어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모두 한 배에 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는 우린 모두 똑같이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차고에는 최고급 차들이 잠자고 있다. 그런 식으로 단 며칠만으로 세상에는 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졌다. 화성에 가서 살고, 복제인간을 만들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던 우리 인류에게 그 한계를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 전 세계가 하나같이 직면한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에서 우리의 휴머니티가 무엇인지 질문해보자. 집에 들어 앉아 이 유행병이 주는 여러 가지를 묵상해보고 살아있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자.

 

3. 역병으로 고통 받아 왔던 인류

 

석학인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 박사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서 ‘총·균·쇠’에서 질병이 인류역사를 바꾸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인류는 세균(혹은 바이러스)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여 왔다. 세균이 공격하면 인류가 방어하는 식이다. 인간은 이를 통해 면역을 강화했고, 세균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만들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지독했던 유행병은 흑사병(페스트)이었다. 이는 1346-1352년 사이에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죽게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발생한 인플루엔자는 2천1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현세도 인류는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AIDS)에 고통 받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8년 전 세계에 3,790만 명의 HIV 감염인이 살고 있고, 이 중 170만 명이 새로 발견되었으며 77만 명이 AIDS 관련 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이처럼 인류는 유사 이래로 여러 종류의 질병에 시달려왔다. 지금 세계인을 포획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도 그 연장선장에 있다 해야 할 것이다.

 

4. 인류 생존의 비결

    

역병에 대한 인류의 대처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인류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환난의 이면에는 인간의 죄와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진정으로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역대하7:14-15).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이 역병은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둘째, 인류는 대 자연을 창조질서대로 관리해야 한다. 그간 인간의 탐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터전이 지구가 병들었다. 이제 인간이 멈춤으로 인하여 하늘이 맑아지고 동물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셋째, 인류는 공동체 의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현대는 문명의 발달로 국경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지구촌이 한 운명체이다. 지구상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가 금새 온 세상으로 나비효과를 드러낸다.  따라서 인류는 예기치 못한 쓰나미들을 예상하며 함께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맺음 말

 

4월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봄이 왔건만 봄을 느낄 수 없다. 예년 같으면 세상은 들뜨기 마련이다. 쾌적한 환경, 무성한 실록, 형형색색의 꽃들, 여기에 겨울잠에서 깨어난 각종 스포츠가 열기를 뿜어댄다. 지구촌은 상춘객(賞春客)들로 가득찰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20년 봄은 잔인하다. 봄나들이는커녕 모두가 방콕 상태에서 멈춰서 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잘난 인간들이 한갓 무생물인 바이러스에 이렇게 휘둘리니 이 또한 아이러니하다. 지금 엘리엇이 살아 있다면 무슨 시를 쓸까? 

모든 음악에는 쉼표가 있다. 쉼표는 음악을 음악 되게 한다. Covid19로 인해 우리는 원치 않는 쉼 가운데 있다. 우리 인생도 더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이 때를 잘 이용해야 한다. 그 방안은 무엇인가? 각자가 절대자 앞에 서면 답이 나올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생명의 소리,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라일락의 소생과 마른 구근초(劬勤草)를 보라. 거기에는 생명의 강인함과 숭고함이 있다. 우리 인간도 저들 화초처럼 역경을 뚫고 새 생명을 발아하는 신비로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jrsong007@hanmail.net

04.2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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