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월에 한국에 있는 조카의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영리하고 예민한 아이인데 정든 유치원을 떠나 친구도 선생님도 낯선 새로운 초등학교로 가게 되면서 몇 주간 동안 울며 힘들어 했다.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지 집에 와서도 자기 방 문 앞에 “나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라고 쪽지를 써 붙여 놓았다고 언니가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귀엽기도 했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안 되어 힘들어 하는 꼬마를 위해 멀리 미국에 있는 이모할머니인 나까지 한동안 기도를 했다. 한 달 남짓 지나서 잘 극복하고 “학교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네” 라고 하며 요즈음에는 즐겁게 학교에 다니고 있다.
한 개인이 강한 애착을 지닌 사람들이나 환경과 분리될 때 느끼는 불안을 “분리 불안(separation anxiety)”이라고 한다. 분리 불안이 심한 경우는 분리불안장애로 구분이 된다. 어린 아이가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낯가림이 아마도 성장과정 중에 처음 겪는 분리불안 현상의 시작일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함께 한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겨질 때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안정감의 근거를 잃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에게 있어서의 분리불안은 아마도 아담과 이브가 죄의 결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존할 수 없는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모든 안전과 행복의 근원이었던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후 하나님을 떠나야했던 인류의 조상들의 마음 속 깊은 곳은 불안함으로 가득했을 것 같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보다 더 큰 불안함이 어디 있으랴. 김영봉 목사님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 가장 큰 재앙이라고 했는데 그 말에 철저하게 동의가 된다.
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철저히 외면당하시는 분리를 경험하셨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짐으로 일시적인 하나님과의 분리를 경험해야 했던 고통의 극치를 보여준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심히 놀라고,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스스로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26:28)고 말씀하셨고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이 수치스럽고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울 것을 생각하며 슬퍼하셨던 것은 아니다.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셔야 할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분리가 너무도 괴롭고 힘드셨던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죄로 인한 분리의 간격을 메꾸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주님의 몸부림이었다.
지난겨울,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딸을 간호할 때 조금이나마 죄의 심각성을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철저하게 격리지침을 따르고 혹시라도 감염이 될까 싶어 마치 나병환자 다루듯이 곁에 오지도, 가지도 못했다. 아파서 고생하는 딸을 한 번 안아주고 싶어도 전화로 기도를 해줄 뿐 손도 잡아줄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바이러스의 위험 때문에 격리해야만 한 것이다. 더러운 죄를 지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딸을 향한 내 마음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의 단절이 주는 고통 때문에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할 만큼 씨름하며 기도했던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내가 확신하노니…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하게 하시니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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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