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전쟁과 노예제도...그 역사왜곡(3)

1) 미국 인디언 학살(虐殺)과 역사 왜곡(History Distortion)

그런데 큰 문제(?)는 약 5세기 동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자행된 아메리카 침략과 인디언들 살해 및 몰살의 천인공로(天人共怒, A Heinous Crime)할 죄악들을 마치 미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행해진 악행(?)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일반 교인들이나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그것은 역사왜곡(History Distortion)이며 무지의 소산이다. 

왜냐하면 첫째, 청교도들은 식민지를 정복한 군인들이 아닌 영국 국왕의 식민(植民)을 허락하는 특허장을 받아 오직 신앙의 자유와 박해를 피해 신대륙 아메리카에 1620년 첫 정착한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1620년부터 1776년 영국 식민지배에서 미국이 독립하기까지는 인디언 원주민과의 전쟁은 영국 왕의 통치 가운데 인디언들과 영국군의 전쟁이었다. 또한 미국이 독립한 이후에는 미국 정부군과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미국독립전쟁’ 이후 “넓고 싼 땅"을 요구하던 백인 정착민이 서진하게 되면서 그곳에 사는 인디언은 저항을 하였고, 이들을 근절시키려는 미국 정부와 인디언 박멸 전쟁이 벌어졌다. 인디언 영토에서 쫓겨나 연방정부가 마련한 땅인 “유보지(Reservation)”에 들어갈 것을 강요하자 격렬한 저항을 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는 청교도와의 전쟁이 아닌 “미국 백인정착민과 미국 원주민인 아메리칸인디언 사이의 정복전쟁”이라고 명명한다. 

그렇지만 전술한 것과 같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제국주의와 야합(?)하여, 선동한 청교도 정치(政治) 목사들과 선교사들, 그 주장에 동조한 정착촌 백인들, 그리고 강성, 극단의 민병대와 정부군에 의해 자행된 인디언과의 정복전쟁으로 말미암은 학살(?)은 인과관계(因果關係)상 분명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윤리, 도덕적 역사의 비판은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당시 제국주의 시대정신 역사의 현장에 있던, 성경적인 청교도들은 원주민 인디언들을 박해, 살해에 다 찬성(Approval)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인디언원주민 선교(Mission)였다.  

물론 이 선교사역 역시 제국주의와 동조 야합한 부정적인 면도 있다. 그렇지만 많은 청교도 목사와 선교사들 그리고 성도들은 진정 인디언들을 품고 사랑했다. 심지어 인디언들을 위해 순교 재물이 되기도 했다

2) 인디언 선교(宣敎)

청교도들이 미대륙에 이주한 역사만큼 인디언선교는 오래 됐다. 인디언의 사도 존 엘리엇(John Eliot, 1604-1690)을 비롯하여 토마스 메이휴(Thomas Mayhew) 2세, 존 카튼 2세, 아브라함 피어슨(Abraham Pierson), 토마스 제임스(Thomas James), 조나단 에드워즈,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와 엘리후 버틀러(Elihu Butler), 사무엘 우스터(Samuel Worcester) 목사 등, 셀 수 없이 많은 청교도들이 인디언 선교를 위해 헌신적으로 최선의 경주를 했다. 

플리머스 헌장에서는 “백인사회와 기독교 종교에 절망하거나 곤란에 빠져 방황하면서 아직 처져있는 야만인들의 개종을 요구한다”라고 기록하기도 하였고, 매사추세츠 베이 헌장에서는 “유일한 참 하나님이요, 인류의 구세주에게 순종과 지식으로 야만인들을 끌어오도록 식민자들에게 요구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야만인들인 인디언들에게 기독교 종교를 보급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던 스페인과는 달리, 청교도 사회에서는 1636년 인디언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도록 법률을 통과시켰다. 

1637년 존 엘리엇(John Eliot)의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1637년 10월, 페쿠옷(Pequot) 전쟁이 끝나자 대패한 인디언들은 백인에게 성공을 안겨준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엘리엇은 농사 기술, 목수 일, 대장장이 일, 무역 등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문자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인디언을 계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디언 말로 된 성경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그들의 문법을 연구한 후에 ‘인디언 문법’을 발간하였고 또한 교리 문답서를 발간하는 등 신앙적인 지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인디언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바뀌고 인디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전파되면서 인디언 선교 붐이 일어나게 됩니다. 1642년 매사추세츠에서는 토마스 메이휴(Thomas Mayhew, Jr.)에 의해서 인디언들에게 개인전도가 시작되었고, 1642년에는 그들에게 공식적인 설교가 선포되었다. 엘리엇 선교사의 요청에 따라 매사추세츠 주 정부는 1651년 나틱(Natick)에 ‘기도하는 인디언 마을’을 건설하였습니다. 인디언 마을에 신정 정치를 실시하여 성경이 다스리는 사회를 세우고자 했던 엘리엇은 성경을 나틱 사회의 대헌장으로 삼고 출애굽기 18장에서 보여준 것처럼 10부장, 50부장 제도를 도입하여 스스로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엘리엇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인디언들은 금식과 기도를 생활화하였고, 인디언 사회는 경건한 분위기로 변모되었습니다”(오덕교, 청교도이야기, pp. 273-277).

 

미국 백인정착민과 아메리칸인디언 사이의 정복전쟁

존 엘리엇 등 청교도 선교사들, 인디언선교위해 헌신

 

그 결과 1674년까지 매사추세츠와 플리머스에는 약 4,000명의 “기도하는 인디언들(Praying Indians)”이 살고 있었던 14개의 마을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존 엘리엇 선교사의 인디언 선교 성과(?)는 1675년 토지 갈등에서 촉발된 “필립 왕의 전쟁”(King Philip's War)과 함께 중단되었다. 즉, 미국 인디언 부족인 왐파노아그 부족과 플리머스 식민지를 구축한 영국군과의 전쟁 때문이다. 

전쟁의 원인이 된 것은 늘어난 영국인 개척자와 그만큼 늘어난 그들의 토지 수요였다. 필립왕 같은 인디언 지도자들은 점점 잃어가는 토지에 분개를 했고, 특히 그의 신경을 자극한 것은 스완지타운 건설이었다. 그곳은 왐파노아그 족의 수도 마운트 호프에서 몇 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플리머스 의회가 군사력을 사용하여 왐파노아그 족의 토지를 마을의 개척자에게 매각하도록 강압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결정적 계기는 1675년 존 사사몬이라는 "기도하는 인디언"(기독교로 개종한 인디언)의 죽음이었다. 사사몬은 필립 왕의 조언자이며 친구이기도 했지만 사사몬이 기독교로 개종하자 두 사람은 결별한다. 인디언 추장 필립은 1675년 정착민 영국인을 공격하기 위해 기독교 인디언 마을들을 먼저 공격한다. 메리맥(Merrimack)에서 코네티컷(Connecticut)까지 위치하였던 이 마을들은 영국인들의 1차 방어선이 되는 바람에 수많은 인디언들이 죽었고, 설상가상으로 질병이 만연하여 수많은 인디언 마을들이 황폐화되었다. 

1676년 2년 만에 영국군의 압도적 승리로 종전되었지만 그 결과 노예로 버뮤다(Bermuda)에 팔려간 토종 인디언을 포함하여 6,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정착민 영국 성인 남성 8%가 사망한 엄청난 참사였다. 이와 같이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 재건을 방해한 자는 침략자 바사(페르시아)인 아닌 동족 사마리아인 산발랏(느2:10)이었던 것처럼 이렇게 항상 선의(善意)에 대한 도전과 응전(엡2:2-3)은 항상 내부(청교도, 인디언)에 있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교는 계속된다. 

“인디언 성경마저 분실되어 마을마다 성경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고 엘리엇은 인디언 성경을 재판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성경 출판 작업을 하게 됩니다. 엘리엇은 평소에는 교회를 섬기는 일로 바쁘게 지내고 매주 주중에는 록스버리에서 18마일이나 떨어져 있던 나틱(Natick)의 인디언 마을까지 말을 타고 가서 복음을 전하는 등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존 엘리엇 선교사는 1637년부터 임종하는 순간까지 53년 동안 인디언에 대한 염려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한평생의 사역이었던 인디언 선교에 대하여 염려하며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쁨이여! 오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별세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사위요 1743년부터 인디언 원주민 사역에 헌신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 선교사의 생애를 보면 그는 성육신적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불타는 사명의식으로 원주민 인디언들을 진정 사랑했다. 자신의 삶을 인디언 복음화로 헌신, 충성하다가 29살에 별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빛나는 인격으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았던 청교도들의 참 본래 모습이다. 

kimjoyh@gmail.com

02.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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