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신앙 회복 및 부흥(復興)”(8)

2)플리머스(Plymouth) 청교도들의 정착(定着, Settlement)

1620년 12월 18일 플리머스에 상륙한 그들은 봄이 되기 전까지 102명중 반수 이상 추위와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인디언에게서 옥수수 재배를 배워 최초의 혹독한 겨울을 타개해 나갔다. 

청교도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플리머스에는 약 2,000명의 왐파노아그(Wampanoag)족 인디언(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청교도의 1620년 정착 후 플리머스는 1621-1691년까지 플리머스 식민지(Plymouth Colony)의 수도였으며 19세기까지 밧줄, 어업, 그리고 운반업이 번창했으며 한 때 세계에서 가장 큰 밧줄 제조업체가 있기도 했다. 

플리머스란 지명은 원래 영국 서남부 끝에 위치한 항구도시를 가리킨다. 지금도 “Mayflower 1620”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영국 플리머스 망대(Plymouth Barbicon) 앞에 있는데, 신대륙(미국)의 플리머스(Plymouth MA)에도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에 “1620” 숫자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도착과 정착은 마치 1969년 7월 16일에 선장 닐 암스트통(Neil Alden Armstrong),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달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Edwin Eugene Aldrin Jr.)이 탑승한 유인우주선 아폴로(Apollo) 11호가 처음으로 달 착륙에 성공함으로 우주를 정복한 쾌거와 비견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필자는 본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은 갈 바를 전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오직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의지하여 사생결단의 자세로 온 것이고, 그 결과 신생국인 미국이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현재까지 전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즉, 세계평화를 위한 강력한 지배력과 통치를 할 수 있는 초강대국, 신명기 28장 1-14절의 미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최초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을 인도한 사람이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였다. 그는 “우리는 이곳에 우리를 오게 하시고 아름다운 항구와 평화로운 땅에 정착하도록 인도하신 하늘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겨울은 매우 혹독하게 춥고 고통스러웠다. 추위와 배고픔과 질병으로 그들의 절반이 땅에 묻히게 되었고,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공격 빌미를 막기 위해 무덤을 감추어야만 했다. 

 

플리머스 상륙 첫 겨울에 절반 사망...인디언 도움으로 옥수수 재배

첫 추수후 인디언 초청 3일간 하나님께 감사...교회, 학교 먼저 지어 

 

“1621년 1월과 2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102명 가운데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사망자 대부분이 비타민 C 결핍으로 발생하는 괴혈병을 얻어 이 세상을 떠났다. 건강한 젊은 청년 5-6명이 매일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일을 했으며, 이민자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디언들이 공격해올 것을 두려워하여 무덤을 위장하기도 하였다. 신앙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것으로 생각한 청교도의 꿈은 깨어지는 것 같았고 이민의 결과는 비참해 보였다.” 

1621년 4월 영양실조와 피곤으로 초대 총독 존 카브(John Carve)가 사망한다. 그의 후계자로 31살 브레드포드가 총독직을 계승하고 약 30년 이상을 재임한다.  

4월 15일에 선장 존슨(Jones)과 선원들이 다시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 갈 때에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미지의 땅에 남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절망의 시기에 영어를 아는 스콴도(Squando, 1614년에 백인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영국으로 잡혀갔다가 그의 고향 플라머스로 돌아옴)와 인디언들이 찾아와 사냥과 낚시하는 법, 조개와 견과류, 딸기와 같은 장과류를 얻을 수 있는 장소와 옥수수를 심는 방법 등을 알려주어 굶주려 죽게 된 절망적 상황에 처한 청교도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드디어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브레드포드의 지도 아래 청교도들은 옥수수와 영국에서 가져왔던 완두콩, 보리 씨앗들을 심게 되었고, 첫 수확을 거두게 된다. 

 

3)첫 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 Thanksgiving Day, 1621년)  

메이플라워에 승선한 청교도 에드워드 윈슬로(Edward Winslow, 1595.10.18–1655.5.8)가 남긴 기록인 ‘모트의 이야기’(Mourt’s Relation)에 의하면, 1621년 가을 53명의 필그림과 도움을 주었던 인디언 90명을 초청하여 눈물겨운 첫 추수감사절을 3일 동안 하나님께 진정 감사를 드렸다.

첫날인 주일에는 온종일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찬송 부르고, 말씀 받아 묵상했다. 둘째 날에는 칠면조 요리, 감자, 옥수수 요리 등을 만들어 서로 나눠먹고, 셋째 날에는 인디언 왐파노아그(Wampanoag) 추장 마싸소이트(King Massasoit) 등을 초대했으며 이들은 사슴 다섯 마리를 잡아와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친교했다. 또한 청교도들은 통나무들을 잘라 먼저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지은 다음에야 자신들의 집을 지었다. 이렇게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삶을 실천하고자 온 청교도들은 북아메리카의 개척자들이요, 믿음의 선조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 주일성수, 십일조, 경건생활을 온전히 실천했다.  

윌리암 브래드포드 메사추세츠 주지사는 1623년 7월 30일, 감사절을 3일간 지킬 것을 공포했다(Governor, William Bradford made an official proclamation of the day of Thanks giving). 

“여러분 모든 청교도들(Pilgrims)이여! 우리의 위대하신 아버지(Father)께서 금년 우리에게 인디안 옥수수와 밀, 완두콩과 호박, 그리고 채소들을 풍성하게 주셨고, 산림을 울창하게 하시고, 바다의 물고기들과 조개들을 풍성하게 주셨고, 야만인들의 습격에도 우리를 보호하셨고, 온갖 유행병과 질병으로부터 우리 생명을 살려주셨고, 우리 양심의 지시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유를 허락하여 주셨나이다. 지금 여러분의 총독인 나는 모든 청교도들이 그대들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1623년 11월 29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회관에 모여 목사님의 설교를 경청하며 이 모든 축복을 내려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공포(선포)하느니라.”

1789년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이날(11월 29일)을 국가기념일로 선포한다. 그리고 약 200년 동안 추수감사절은 지역과 주마다 날짜가 제각각이었으나, 1863년 제 16대 미합중국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1863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 국가공휴일로 선포했다.

그 후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해마다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 국가공휴일로 선언하다가 추수감사절이 연방법정공휴일로 지정된 때는 1941년이다. 즉, 11월 넷째 주 목요일부터 나흘간 추수감사절 연휴이다. 그리고 대통령은 매년 담화문을 통해 1621년 플리머스에서 있었던 최초의 추수감사절이 갖는 중요성과 이날의 역사적인 전통에 경의를 표한다. 이처럼 청교도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이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 미국은 위기 때마다 의회가 ‘전국민 겸비와 금식의 날’을 정하고 대통령은 이를 정부 공식일정에 포함,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했던 나라이다.  

또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사람들은 매사추세츠에 도착하기 전에 배 안에서 소위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을 체결하여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하나의 시민 정치체계를 만들고 필요한 법률과 공직을 제정한다.  

16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 서약에 41명이 서명(署名)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아래에 서명한 우리는 대영제국, 프랑스 및 북아일랜드의 신, 국왕, 신앙의 수호자 등등의 은총을 통해 숭배하는 군주인 국왕 제임스 1세(잉글랜드 왕) 제임스의 충실한 신민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및 국왕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버지니아 북부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항해를 계획했고 개척지에서 질서와 유지, 위의 목적의 촉진을 위해서 하나님과 서로의 앞에 엄숙하게 서로 계약을 체결하며…, 정당하고, 평등한 법률, 조례, 법, 헌법이나 직책을 만들어 우리 모두 당연히 복종과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 위 서약에 따라 개척지는 성인 남자가 참여하는 ”민회(民會)”에 의해 통치된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훗날 미국 헌법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자유를 찾아 미지의 신대륙으로 온 102명의 메이플라워호 사람들을 후세 사람들은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고 부른다. 이 필그림 파더스가 바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선조들이다. 

06.2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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