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자의 노래(하)

정치가 꼬이고 계층이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교회가 갈등과 분쟁의 홍역을 치르는 것도 따져보면 네 탓으로 떠넘기는 악성 바이러스 때문이다.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위기의 폭풍도 외면할 수 없다. 물론 원인과 단초를 제공한 것은 나와 우리라고 치자. 그러나 외풍이 너무 심하다. 마치 컨소시엄이라도 이룬 것처럼 모든 매체와 단체들이 비난과 공격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방패도 없고 갑옷도 없다. 이쯤에서 한국교회는 자중지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교회연합체의 균열도, 교회 내의 갈등도 끝점을 찍어야 한다. 더 이상의 추락을 막아야 한다.

바울은 다양한 사역자였다. 사도였고, 신학자였고, 목회자였고, 선교사였다. 그리고 대설교가였고, 교회 개척의 선구자였다. 바울 같은 철저한 복음의 사람이 되고 목사가 되는 것이 필자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겪었던 온갖 박해와 고난, 아픔과 가난은 싫었다. 그러니까 돌이켜 보면 필자는 함량미달 목사였고, 빚다 만 그릇이었다.

바울의 위대함을 한두 가지로 적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학의 샘은 팔수록 깊었고, 신앙의 탑은 우러러보기 힘들 만큼 크고 높다. 그의 청빈은 너무나 맑고 깨끗해 흉내조차 힘들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는 그 한마디에 머리를 들 수 없다.

더더욱 감동적인 그의 행적은 마무리다. “나는 선한 싸움을 사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는 완주자의 노래, 멋진 마침표가 감동적이다.

싸움은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적과 싸워야 한다. 바울은 그 대상을 “혈과 육이 아니라 세상 악한 권세들과 악한 영들이라”했다(엡6:12). 우리는 싸움의 대상 설정에서부터 잘못을 저질렀다. 전우를 적으로, 형제를 원수고 여기고 싸웠다. 걸핏하면 교파를 나누고 갈라서기를 되풀이 했다. 치졸한 싸움판에서 기선을 잡았노라며 개선의 노래를 불렀고 지금도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느라 믿음은 송두리째 저버리고 혈과 육을 동원해 싸움판을 벌이곤 했다. 일평생 걸어온 목양길의 동기와 과정이 믿음이었나를 돌이켜 보면 부끄럽고 송구하다. 하나님의 목회라면서 잔머리 굴린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바울의 고백은 목회를 내려놓은 지금도 태산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말씀도 떠오른다(요19:30).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목회자의 삶이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풀이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책임지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는 자괴감으로 괴롭다. 앞에서 다시 목회를 한다면 이런 목회를 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는가“ 할 만큼 했는가?’라는 물음엔 입을 열 수가 없다.

동역자들에게 권하고픈 말이 있다. 그것은 목회에 마침표를 찍는 날 완주자의 노래를 부르자는 것이다. 목회뿐이겠는가? 인생도 그렇다. 언젠가 우리는 인생 삶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때가 언제인가는 보내시고 부르시는 주님만 아신다. 지금 누리는 그 자리, 머무는 그것, 움켜쥔 그것들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설교한다. 그러나 목사에게 욕심을 버리라, 내려놓으라, 낮추라고 설교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비행기는 엄청난 양의 화물과 사람을 싣고 장시간 하늘을 난다. 그러기 위해 최첨단의 가볍고 강한 소재를 개발해 동체를 만든다. 그리고 거추장스런 인테리어나 장식을 피한다. 코끼리가 하늘을 나는 비결은 체중을 1만분의 1로 줄이는 것이다. 과체중, 과부하, 피할 것들이다. 들림 받는 그날, 바울처럼 완주자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빈손으로 주님의 그 큰 손을 덥석 붙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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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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