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무(田耕武)는 1900년 평안북도 곽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를 따라 1906년에 하와이로 이주했다. 그는 1913년 유학차 도미하여 미국인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가주 리버사이드에서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데 1916년에도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학교는 리버사이드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클레먼트 중학교였다. 미시간 주립대학에 입학한 그는 재학 중 웅변반 반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정치학을 공부하고 1924년에 미시간 주립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미시간주립대학을 졸업한 그해 전경무는 부모가 거주하는 하와이로 돌아가 자동차 도장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1931년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원단체인 단합회에 가입하고 임정을 적극 후원했으며 임정 후원은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한국광복진선 결성에 참여하면서도 계속되었다.
전경무는 1932년 9월에 시카고로 이주했다. 그는 대한인국민회 민간 외교원으로 미국 중서부에서 각 정치 및 사회단체의 여론을 고취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1월 그는 시카고 빈센 회사에 취직했다. 당시 그는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전경무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담임전도사
전경무가 시카고로 이주한 다음 달인 1932년 10월 23일에 갈홍기가 박사학위 공부와 국제학생회 업무 등 여러 가지로 분망하여 시카고한인감리교회 목사직을 사면했다. 그는 약 1년간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이듬해인 1933년의 2월에 시카고 한인감리교회는 전경무를 전임 전도사로 청빙하고, 이에 신구 목사의 이취임식이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예배당 사교실에서 5, 60명이 모인 가운데 있었다. 본 교회 이사였던 김 경의 사회로 개회하고 ‘우리 교회가 갈홍기 목사의 과거의 정신적 물질적 충실한 교역을 항상 기억할 것이며 더욱이 새로 취임하신 전경무 전도사와 만사에 협동하여 시카고교회가 특별히 기독의 정신 즉 사랑과 자유와 평등주의와 인권보존 등을 발휘하도록 노력하여 우리 한인교회와 사회에만 행복을 보급할 뿐 아니라 온 인류사회의 행복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말로 사회사를 대신했다. 교회 이사장 장세운의 가슴이 터지는 송별사와 환영사에 이어 염광섭과 배민수와 백인 킹 씨 및 전경무 부인 등의 간단한 감상담과 갈홍기 목사의 고별사가 있은 다음에 갈홍기 목사의 고별사가 있었다.
그리고 난 후 전경무 전도사가 취임사 겸 목회방향을 말했다. 그의 목회방향은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을 발휘할 것과, 사회운동과 정치운동과 경제운동에 주력할 것과 그리고 미국에서 출생한 제2세 국민에게 교육을 보급해서 조국의 정신과 조국의 문화와 언론에 충실한 사회 인격이 되도록 노력하는 등 세 가지였다.
전경무의 첫 행사참여는 강영승 박사 환영회였다. 학생회와 국민회와 흥사단 등 세 단체가 연합으로 1933년 2월 11일 밤 국제회관 내에서 가진 강 박사 환영회는 대성황이었다. 학생회 사교부위원장 이응영의 사회로 배민수의 기도 후 1시간 식사한 뒤 사회자의 간단한 환영회 이의, 국민회 지방회장 한장호의 환영사, 강영승 박사의 답사, 김베세의 ‘사비수 노래’ 독창이 차례로 있었고, 전경무가 갈홍기, 김 경 등과 함께 감상담을 말했다. 그리고 친교순서가 있은 후 늦게 마쳤다.
그해 2월 강영대가 4, 5년간 경영하던 ‘로랜스 카피테리아’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지자 김 경이 동업하기로 하여 김 경이 거대한 자본을 투입하고 식당을 위생적으로 적합하고 미술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수리하고 더욱이 사무실과 지하실을 새롭게 수리하고, 주방을 광대하고 청결하게 벽돌로 새로 건축하였다.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낙성식을 거행하였는데 이 낙성식에 전경무가 사회를 보았다. 그의 간단한 사회사에 이어 다수의 내빈축사가 있었고, 늦게까지 친교 하다가 해산했다.
그해 삼일절 기념식이 본 교회에서 장엄하게 있었다. 식장과 여러 가지 만반준비에 힘을 많이 써준 강정근과 박영직 등과 함께 전경무에게 본 기념식 사회자가 감사를 드렸고, 이에 모인 회중이 박수로 사례했다.
그해 4월 김창호가 사망했다. 그는 시카고에서 20년간 사업 혹은 노동 생활을 하였는데 그달 1일 밤에 중국인 타운에서 자동차에 중상을 입은 후 국민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5, 6 시간을 지나지 않아 영원히 이 세상을 등졌다. 전영무는 자신과 함께 김 경, 강영승, 한장호, 김홍기, 윤 림과 장례위원회를 조직하고 장례식을 한 후 마운홉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그의 유산은 장례위원회가 조사하여 그의 친척에게 보냈다.
그해 12월 25일 저녁 본 교회당에서 있었던 성탄축하식은 교회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준비하였다. 전경무의 사회로 김 경의 맏아들의 찬송과 기도 후 강영소의 아들과 천세헌의 자녀로 구성한 합창에 회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한장호의 네 살 된 어린 딸의 독창에 교인은 크게 박수갈채로 환영하였고, 소녀는 세 번이나 앵콜에 답했다. 피아노 독주로 이관하의 딸이 출연했고, 한장호의 아들의 피아노 독주에 찬사를 마지않았다. 그리고 갈홍기의 성탄사가 있은 다음 11시까지 친교했다.
전경무는 1933년 6월 11일 주일에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담임 전도사직을 사면했다. 그는 4개월간 시카고 한인감리교회를 섬겼다. 교인들은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보수 없는 일에 성력을 다하여 교회를 위하여 시무함에 감사를 마지않았다.
전경무의 사진이 들어간 복권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이사
전경무가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담임 전도사직을 사면한 6월 11일 주일에 교인대회를 개회하고 금년에 교회를 관리할 신임이사를 선거하였는데 전경무가 이사로 선임되었고, 그 외에 장세운, 한장호, 임 호, 김 경, 강정근 그리고 하회옥이 이사로 선정되었다.
전경무가 사임한 그달 23일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중서부연회가 제11회를 맞아 시카고 한인 감리교회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는 전경무가 황창하와 이병두 등의 알선으로 1923년에 조직되었는데 전경무가 개최장인 시카고 한인감리교회의 이사로서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해 9월 20일에 버지니아 주에서 오현승이 사망했다. 그는 평북 정주군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유학차 도미하여 시카고중앙기독청년회 기계전문과와 타그란지 항공학교에서 공부하였고, 가을학기부터 버지니아 육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내려가던 중 백인의 자동차와 충돌하여 참혹하게 횡사했다. 동행하던 한기도, 조한언, 박 필, 박순욱 등이 주선하여 버지니아 채스트널에 안장했다. 고 오현승군의 추도식에 그가 이사로 참석하고 장비로 1달러를 기부했다.
1933년 2월 시카고한인감리교회 전임 전도사로 청빙 4개월 시무
이후 이사, 건축기성위원장으로 헌신...귀국 후 이화여전 교수 등
건축 기성위원회 위원장
1934년 초에 전경무는 사업차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하였다가 그해 5월에 시카고로 다시 이주했다가 그해 12월에 캘리포니아주 나성으로 이주했다. 그는 나성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1938년 8월 3일 저녁에 본 교회를 관리할 신임감독 마틴 박사를 위한 만찬회가 있었다. 윤 혁의 사택에서 미국교회 측에서는 마틴 감독부부와 프라이 박사부부 그리고 데비스 목사부부가 참석하고, 한인교회 측으로는 동 교회 목사 황사용과 예배당 건축기성위원회 위원, 주일학교 교사, 찬양대 대표 등 수십 명이 참석했다. 만찬회 사회는 전경무가 맡았다. 그의 유창한 영어는 회식의 흥미를 북돋웠다. 만찬회 후 동 교회 예배당에서 환영회가 있었다. 총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경무의 귀빈 소개에 이어 주일학교 학생의 합창, 찬양대의 찬양이 있었다. 이날 마틴 감독은 수년 전에 본 교회가 계획한 총 15,000달러의 예배당 건축을 이루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건축 기성위원회의 회장에 전경무였고, 영문서기에 이마리아, 국문서기에 최능익, 재무에 황성택과 임 폴 그리고 건축 예산위원에 김필권, 황성택, 최능익이었다.
이듬해 2월에 나성한인감리교회 계삭회는 몇 가지 결의를 하였다. 이중 신축 예배당 기기를 속히 매수하고 이를 실행할 5인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전경무를 선정했다. 그 외 5인 위원회에 닥터 나인과 닥터 데비스 등 외국인 두 명과 황사용, 황성택 등 한인 두 명 등 총 4명이 더 있었다.
귀국
하와이로 건너간 전경무는 하와이 태평양 주보와 국민보의 합동한 신문의 주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워싱턴 사무원과 위의 연합위원회 의사부 대표, 그리고 신한민보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조국이 해방되자 귀국한 전경무는 이화여자전문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무렵 그는 조선체육회 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영입되어 런던올림픽 참가를 목표로 IOC 가입을 추진했다. 그런데 1947년 6월 15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제40차 IOC 총회에 참석차 5월 29일 저녁 미 군용기를 타고 가던 중 일본 동경 근처의 산정에서 탑승 비행기가 충돌하여 참사하였다. 그의 체육장 영결식은 6월 18일 오전 10시에 서울 운동장에서 정중하게 거행되었다. 전경무는 11세 된 딸 하나를 남겨두고 경기도 남양주군 금곡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95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고인을 추모하는 뜻으로 올림픽 파견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복권발매에 고인의 사진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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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