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런 뜻이었어?

바울은 그의 몸에 (가시가 아니라) 말뚝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평생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하나 안고 살아갔다. 그의 몸 속에 있는 가시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7).

바울은 질병에 시달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바울이 눈이 안 좋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의 체험을 할 때 3일 동안 보지 못한 적이 있다. 그때 바울에게 비추어졌던 강렬한 빛 때문에 눈이 손상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랬는지 바울은 평생 시력이 안 좋았다. 서신들을 쓸 때에도 대필을 하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직접 이렇게 썼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6:11).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눈 때문에 고생을 해서 그랬는지 바울을 위해서 그들의 눈이라도 빼주고 싶어 했다고 갈라디아서(4:14)에서 밝히고 있다.

바울을 평생 괴롭혔던 그의 몸에 있던 가시가 간질이었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바울이 간질에 시달렸다고 상상해 보라. 바울이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입에 거품을 토하면서 땅바닥에 뒹군다. 잠시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깨어난다. 그리고 계속 설교를 한다. 바울이 간질에 시달렸다면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문은 다 퍼져 있었을 것이다. 만일 목사가 이런 간질병에 시달린다면 어느 교회에서든 목회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를 환영해 주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정말 바울이 이런 간질병에 시달렸을까? 어떤 근거로 바울이 간질에 시달렸다고 하는 것일까?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갈4:14).

여기서 ‘버리다’라는 단어 ‘에크프튜오’(ekptuo)는 ‘침을 뱉다’라는 뜻이다.

바울이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그에게 침을 뱉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병이 걸렸다고 침을 뱉는 경우도 있는가? 도대체 어떤 병에 걸린 사람에게 침을 뱉을까? 고대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대들면 침을 뱉어서 귀신을 내어쫓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귀신들렸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니고 귀신들린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런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질병일까? 간질이다. 고대에는 간질병이라는 것이 따로 없으므로 간질 하는 사람을 귀신들린 사람으로 여겼다(막9:14-29).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이 간질로 고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바울이 간질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 ‘가시’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시가 아니다. 헬라어 ‘스콜로프스’(skolops)인데, 이것은 그냥 가시가 아니라 말뚝이다(고후12:7). 말뚝을 땅에 박을 때에는 끝을 뾰족하게 깎는다. 그렇게 뾰족한 말뚝을 말한다. 바울은 자기 몸 안에 그런 말뚝이 들어있어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고 고백했다.

예전에 신장 결석(kidney stone)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방에서 데굴데굴 뒹굴었다. 견디다 못해 한밤중에 응급실까지 갔었다. 후에 소변을 통해서 나를 괴롭혔던 그 돌이 나왔는데,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렇게 작은 것이 나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다고 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바울은 말뚝이 몸 안에 들어있다고 했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그런 표현을 했겠는가?

바울은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런 가시(말뚝)을 주신 것이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어야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누구보다 바울 자신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가시(말뚝)가 그를 찌를 때마다 납작 엎드려 간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을 것이다.

한번은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토저 목사님에게 송곳을 주시면서 교만하게 부풀어 오른 자아에 구멍을 내서 바람을 빼라고 하셨다고 한다. 바울도 가시의 의미를 그렇게 해석했던 것이다.

사막에서 차가 모래 속에 빠지면 대개는 액셀레이터를 더 세게 밟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바퀴가 더 깊이 빠져 들어간다. 뒤에서 밀어도 보지만 안된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은 하나다. 그것은 바퀴에서 바람을 빼는 것이다. 바퀴에서 바람을 어느 정도 빼면 차가 내려앉게 되고 무게 중심이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바퀴가 땅에 닿는 면적이 넓어지게 된다. 이렇게 바람을 뺀 다음 밀면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더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더 깊이 빠져 들어갈 뿐이다. 방법은 하나다. 자신만만한 자아의 바람을 빼야 한다.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자아에서 교만의 바람을 빼야 한다. 그럴 때 우리를 가두어 두었던 인생의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그러라고 우리에게 인생의 가시(말뚝)을 주실 때가 많다.

jinhlee1004@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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