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목사 빛과 소금교회 / (310)326-9092 E-Mail: LSPC0316@yahoo.co.kr
Q: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에 배를 타고 왔다가 대동강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설교자를 통해 여러 번 들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고 그의 순교의 피로 한국에 어떻게 선교의 열매가 생기게 되었는지 보다 상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산 페드로에서 김 집사
A: 토마스 선교사는 원래 한국에 선교사로 오기 전에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사람입니다. 1863년 12월 추운 겨울에 런던대학을 졸업한 23세의 젊은 선교사는 갓 결혼한 아내 캐롤라인 갓프리와 함께 중국에 도착하여 살다가 풍토병으로 결국은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토마스는 선교를 위해 조선어를 습득하게 되고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황해도 창린도에 와서 2개월 반을 머물면서 선교를 합니다. 토마스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서 조선선교를 불태우며 기회를 찾고 있던 중에 1866년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배에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했습니다. 이때에 대한 내용을 박용규 목사가 쓴 “평양대부흥 이야기”란 책을 보면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박규수는 문정관을 파송해 입국경위를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토마스는 야소교(耶蘇敎)를 전하려 왔다는 사실, 통상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문정관이 청국의 허락이 없이는 통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셔먼호가 양각도에서 불행히도 좌초합니다.
결국 박규수는 셔먼호를 불태우기로 작정하고 불타는 나룻배를 보내 셔먼호에 불에 옮기려했습니다. 배에 탔던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군관들이 그들을 처형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가지고 뭍으로 올라온 한 젊은이는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뭍으로 나와 자기를 죽이려는 병졸 박춘권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최후의 기도를 하며 가지고 온 성경을 받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받기를 거부하고 이내 그를 처형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26살의 젊은이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지 2년6개월 후에 아내의 뒤를 이어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순교로 인한 교회의 씨는 토마스가 죽던 바로 그날부터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무슨책이길래 죽어가면서도 그 책을 건네주려고 했을까하는 생각에 동료 몰래 그 현장에 가서 흩어진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박춘권은 그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훗날 가면주교회의 영수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읽고 주교회 조카 이영태가 주님을 영접하고 평양숭실대학에 진학해 졸업한 후 레이놀즈교회 조사가 되어 우견을 갖고 있던 한글성경 2/3를 번역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합니다.
박영식이라는 평양의 영문주사는 토마스로부터 건네받은 한문성경 3권을 자기 집에 도배지로 사용했습니다. 바닥과 벽과 천장까지 성경으로 도배한 집에서 결국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고 그 집에 자주 놀러왔던 최치량 소년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것은 성경으로 도배한 이 집이 평양에서 최초의 교회 즉, 널다리골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널다리골교회가 바로 1907년 1월 14일과 15일 놀라운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의 전신입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이 말한 것과 같이 순교는 교회의 씨라고 말한 것은 진리로 한국교회에 그대로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태동과 성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