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의 박해를 끝내고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주었지만 콘스탄틴 이후로 교회의 타락이 시작됐다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상세히 알고 싶습니다.
-하버에서 이희은
A:.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288-337)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황제들에 의한 박해가 막을 내리면서 교회의 타락은 시작되었고 로마천주교회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교회의 타락도 콘스탄틴 이후에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오덕교 교수의 장로교회사(p. 53-57)를 참고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교권주의의 등장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전에는 기독교인들이 박해의 대상이었지만 황제의 개종과 함께 교회지도자들은 황실로부터 급여를 받으며 황제의 식사 초대를 받는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목사의 지위가 올라가게 되자 목사직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목회자 사이에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이 점차로 심화되었습니다. 교세에 의해 목회자의 권위가 평가되면서 큰 도시교회의 주교가 지방교회의 주교보다 중시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도시의 주교가 중소도시의 교회들을 지도 감독하면서 교구 주교(bishop of diocese)가 생겨났습니다. 이때부터 한 국가의 수도에 위치한 주교는 대주교(Metropolitan bishop 혹은 archbishop)라고 불러졌고 지방교구의 주교위에 권세를 행했습니다. 또한 대주교 사이에 권력투쟁이 시작되면서 총대주교(Patriarch)가 생겨났습니다. 로마의 감독(주교)은 유럽의 모든 교회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망을 드러내어 세속권에 대항 교회권의 우위성을 강조하며 세속 군주처럼 행동하였습니다. 395년에는 주피터(Jupiter)신의 대제사장 칭호인 대사제(Ponifex Maximus)라는 말을 자신의 칭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로마교회의 감독(교황)을 대사제(Pontiff)라고 칭하기 시작했고 로마감독이 하나님의 사자인지 이방종교의 사제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졌습니다.
둘째. 예배의 형식화와 기도문 등장입니다. 교회정치가 인위적인 형태로 변질되자 인간의 고안을 중시하고 전통을 지지하는 예배가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단순하고 신령과 진정의 예배보다 형식과 외적치장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당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기도문이 등장하여 기도가 주문같이 읽혀지게 되었고 기도를 고행의 수단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교부 바실은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예배의 형식화로 보고 사용을 경계하였습니다.
셋째, 평신도와 사제의 구분과 계급화입니다. 4세기 말에 사제들이 노동자들이 입던 망토를 고수하여 사제복이 되었는데 사제복의 등장으로 복장을 통하여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별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사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는 사죄를 받게 된다는 사제주의 사상이 일어났습니다. 제단, 희생, 사제, 대사제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고 교회는 계급화가 되었습니다. 평신도 간에도 섬김을 위해 존재하는 집사 직분이 집사와 부제( subdeacon)로 나누어졌습니다. 공예배와 성례 때 사제를 보좌하여 돕는 기능이 중시되면서 집사를 부제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넷째, 마리아 숭배입니다. 이교도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교적인 의식을 도입하면서 로마와 그리스 사람들이 섬기던 여신숭배가 교회 내에 들어왔습니다. 여신숭배는 마리아 숭배로 이어졌고 동정녀 마리아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마리아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로 간주했습니다.
06.26.2021